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하늘은 낡은 증기 엔진의 연통에서 뿜어져 나온 희뿌연 잔상으로 가득했다. 거대한 황동색 강철 구조물들이 뼈대처럼 솟아오른 고층 빌딩들 사이, 유리와 금속이 뒤섞인 아파트 단지는 마치 거대한 기계 장치처럼 끊임없이 웅웅거렸다. 강현의 13층 아파트, 1303호는 그 웅웅거림 속에서 유독 조용했다. 혹은, 너무 조용했다.
강현은 막 끓어오른 증기 포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닳아빠진 황동 레버를 돌려 스팀 밸브를 잠그자, 포트는 느릿하게 숨을 고르듯 쉭쉭거렸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는 거실 창밖을 응시했다. 아래로는 동력 전차들이 덜컹거리며 금속 바퀴를 굴렸고, 하늘에는 작은 개인 비행정들이 반짝이는 등불을 매달고 유영했다. 이 모든 기계적인 소음 속에서도, 오늘 밤 아파트는 기이할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피곤한가 보군.”
강현은 중얼거렸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태엽식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째깍, 째깍. 정교한 톱니바퀴들이 유리판 아래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시간은 오후 9시 37분.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쨍그랑!
작은 소리였지만, 강현의 심장을 쿵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부엌에서 나는 소리였다. 깨진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좀 더… 둔탁하고, 불길한 금속성 울림이었다.
“뭐지?”
강현은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가스등이 흔들리는 노란 불빛 아래,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스테인리스 컵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컵은 찌그러지거나 깨지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멀쩡했다. 마치 누군가 그걸 잡고 있다가 살며시 놓은 것처럼.
“바람인가…?”
강현은 작게 중얼거렸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풍구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컵을 주워 다시 싱크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거실로 돌아왔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렸거나, 아니면 잠시 정신을 놓친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책을 펼치고 독서를 시작했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귀 기울이지 않아도, 벽 속에서 미세하게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혹은 낡은 파이프 속을 증기가 천천히 흘러가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이 아파트는 오래된 건물에 증기 동력 시스템을 새롭게 도입한 곳이라, 그런 소리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소리가 너무… 생생했다.
강현은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10분.
책상 위에 놓인, 증기 압력으로 작동하는 작은 황동 오리 인형이 있었다. 원래는 장식용이었지만, 어딘가에서 증기 압력에 미세한 변화가 생기면 오리 머리 위의 작은 프로펠러가 느릿하게 돌아가곤 했다. 지금, 그 프로펠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더 신경질적으로.
강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리 인형에 다가갔다.
“이게… 왜 이러지?”
손가락으로 인형의 프로펠러를 살짝 건드리자, 인형은 멈췄다가 다시 징징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속도로.
그때, 거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 하나가 삐걱거리며 기울어졌다. 강현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그림에 닿자마자, 그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착각인가? 환상인가?
강현은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다. 하지만 뭔가 있었다. 분명히. 공기 중에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으스스한 정전기가 느껴졌다. 피부에 닿는 느낌은 섬뜩하게 차가웠다.
그는 부엌으로 다시 향했다. 아까 떨어졌던 컵은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컵 옆에 놓여 있던 나무 도마가 반쯤 싱크대 밖으로 밀려나와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 도마를 끌어당긴 것처럼. 그리고… 컵 안쪽 바닥에 작은 이물질이 보였다. 검고, 반짝이는. 강현은 조심스럽게 컵을 들어 올렸다. 컵 안에는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손톱보다도 작은, 새까만 강철 톱니바퀴. 어디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존재감이었다.
“젠장.”
강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부엌의 증기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전등 내부의 작은 스팀 터빈이 굉음을 내며 미친 듯이 회전했다. 노란 불빛이 미친 듯이 명멸하며 부엌을 지옥의 공간처럼 만들었다. 윙- 윙- 윙- 증기등의 날카로운 굉음이 강현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봐! 그만해!” 강현은 소리쳤다.
증기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리가 더 커지면서, 마치 거대한 기계 괴물이 숨을 쉬는 듯한 쉭쉭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싱크대 아래의 수도관들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 억지로 밀려 올라오는 것처럼, 낡은 금속들이 뒤틀리는 소리가 온 부엌을 채웠다.
강현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더 이상 익숙한 아파트의 부엌이 아니었다. 명멸하는 불빛 속에서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벽에 걸린 낡은 구리 냄비들이 덜컹거리며 서로 부딪혔다.
그리고, 문이 저절로 닫혔다.
쾅!
강현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부엌 문은 분명히 열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닫혀 있었다. 안에서 잠긴 것처럼, 굳게 닫혔다.
“누구야…! 누구냐고!”
강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등 뒤로 차가운 금속 벽이 느껴졌다. 윙- 쉭- 덜컹! 증기등의 굉음과 수도관의 진동,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계적인 속삭임 같은 소리들이 강현을 에워쌌다.
그때였다. 컵 안에 있던 작은 톱니바퀴가, 스스로 컵 바닥에서 튀어 올라 강현의 발치로 굴러왔다. 그리고는 멈칫하더니, 방향을 바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강현의 발목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왔다.
강현은 미친 듯이 소리치며 발을 들어 톱니바퀴를 걷어찼다. 톱니바퀴는 벽에 부딪혀 팅-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아니,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명멸하는 불빛 속에서 거울 속 강현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눈동자는 마치 낡은 태엽 인형의 유리알처럼 텅 비어 있었고, 입술은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 뒤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수많은 톱니바퀴와 황동색 파이프들이 얽히고설킨, 기계적인 형체가.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기계 괴물처럼 움직이며, 거울 속 강현의 얼굴을 서서히 뒤덮어갔다.
강현은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차가운 유리면에 닿는 순간, 거울 속의 기괴한 형체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와 동시에, 온 부엌의 수도관이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쉬이이이이익- 콰르르르륵!
뜨거운 증기와 녹슨 물이 사방으로 분출하며 부엌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강현은 눈을 감았다. 살이 타들어갈 것 같은 뜨거운 증기, 귀를 찢을 듯한 굉음, 그리고 그 모든 혼돈 속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작은 톱니바퀴들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
그는 필사적으로 문을 잡고 돌렸다. 젠장, 열리지 않았다.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 기계적인 악몽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강현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그의 머리 위로, 터진 수도관에서 뿜어져 나온 증기가 거대한 기계의 숨결처럼 덮쳐왔다.
“안 돼…!”
강현은 절규했다. 이 아파트는, 그의 집은, 이제 더 이상 그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낡은 톱니바퀴들이 조여지는 듯한 비명 속에서,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거대한 기계 장치 안에 갇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기계는 지금, 그를 향해 천천히, 하지만 맹렬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