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눈을 뜬 폐허**
이현은 눈을 떴다. 첫 감각은 작열하는 목마름이었다. 혀가 사막처럼 바싹 말라붙어 입천장에 들러붙은 듯했고, 식도를 따라 타는 듯한 통증이 기어 올라왔다. 뻑뻑한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뿌연 잿빛 하늘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진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들이었다.
“젠장… 여기가 어디지?”
목소리는 쉬고 갈라졌다. 마치 오랫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거칠었다.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허벅지 안쪽과 종아리는 마치 수십 킬로미터를 달린 사람처럼 욱신거렸고, 둔탁한 머리 통증이 관자놀이를 지분거렸다.
어렴풋한 기억은 고작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졸던 순간뿐이었다. 늘 그랬듯 시끄러운 소음과 사람들로 꽉 찬 공간. 그 틈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시야 한구석에 들어온 익숙한 듯 낯선 풍경에 이현의 눈이 경련하듯 떨렸다. 저 멀리, 한때 서울의 상징이었던 N타워의 잔해가 보였다. 하지만 그 높은 위용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거인이 휘두른 망치에 맞아 부서진 장난감처럼 절반쯤이 꺾여 기괴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주변의 고층 건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 앙상한 골조만 드러내고 있었고, 외벽은 거무튀튀한 곰팡이처럼 광범위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건물 사이를 잇던 도로는 거대한 균열이 가고 뒤집혀 있었으며, 한때 질주하던 차들은 녹슨 껍데기만 남아 흉측한 조형물처럼 박혀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폐허였다. 드넓게 펼쳐진 회색빛 콘크리트 사막. 빌딩 숲은 거대한 무덤처럼 솟아 있었다. 귓가에는 매미 소리도, 자동차 경적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바람이 낡은 철골 구조물 사이를 스치며 내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만이 고막을 긁어댔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이건 꿈일 리 없었다. 모든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발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거친 자갈의 감촉, 폐부를 찌르는 듯한 퀴퀴한 먼지 냄새, 눈앞에 펼쳐진 절망적인 풍경까지.
“말도 안 돼….”
이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바닥을 폈다. 굳은살이 박혀 투박해진 손. 손가락 끝에 낀 뼛조각 같은 흙먼지. 그리고… 자신의 옷차림.
그는 늘 입던 말끔한 정장이 아니라, 낡고 헤진 작업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팔꿈치와 무릎 부분은 천이 닳아 너덜거렸고, 여기저기 흙과 기름때 같은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낯선 휴대용 나이프 하나와 플라스틱 물병, 그리고 바싹 마른 에너지 바 하나가 전부였다. 지갑도, 스마트폰도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는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기억이 선명해졌다. 지하철 안, 흔들림과 함께 느껴졌던 강렬한 빛. 그리고 이어지는 끔찍한 압력과 함께 모든 것이 암전 되던 순간.
그 후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이곳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분? 몇 시간? 아니면… 며칠?
그는 주변을 자세히 살폈다. 자신이 쓰러져 있던 곳은 거대한 빌딩의 잔해 속이었다. 지상에서 십 미터쯤 떨어진, 마치 폭격을 맞은 듯 파괴된 건물 층계 참 같은 곳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한 높이였다. 어떻게 이곳으로 떨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점점 현실감이 밀려들자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더 이상 그가 살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죽음의 기운만이 감도는 공간.
이때였다. 그의 귓가를 뚫고 들어오는 긁히는 듯한 소리.
스스슥… 캉! 스스슥… 캉!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였다. 이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주변을 살폈다. 숨이 턱 막혔다. 설마… 다른 생존자가 있는 건가?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잔뜩 긴장한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건물 틈새,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곳 너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작은 망치 같은 것을 든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주변의 잔해를 뒤지며, 무언가를 긁어내고 있었다. 이현은 조심스럽게 그 사람의 모습을 관찰했다. 낡은 방진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앙상하게 드러난 팔다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지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지만, 그의 움직임에는 이 폐허에 익숙해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숙련된 침착함이 묻어 있었다.
이현의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사람이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 하지만 저 사람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해야 할지, 아니면 도움을 청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폐허에서 살아남은 사람. 그들은 어떤 존재일까? 적일까, 아군일까?
망설임도 잠시, 그 사람은 흙먼지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몸을 숙였다. 그리고 낡은 천 조각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감싸 품에 넣었다. 이현은 그 광경을 무심코 지켜보다가,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화들짝 놀라 다시 몸을 숨겼다.
그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섬뜩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는 마치 이현이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듯, 한동안 이현의 방향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느릿한 발걸음으로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정적만이 남았다. 이현은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의 존재는 이현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한 줄기 희망을 주었다. 이 폐허에 자신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현은 바싹 마른 목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피어났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그는 주머니에 있던 플라스틱 물병을 꺼내 흔들었다. 찰랑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안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물병을 꽉 움켜쥐었다. 살기 위해서, 우선 물을 찾아야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갈라진 입술을 꽉 깨물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으로 폐허를 응시했다. 무너진 도시, 침묵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 거대한 무덤에서, 이현의 생존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재앙에 휘말려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지배할 뿐이었다.
“젠장….”
다시 한 번 읊조린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갈라지지 않았다. 대신 바싹 마른 목구멍 속에서 단단한 결의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었다. 폐허의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마치 이곳의 비극을 속삭이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