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도시의 숨결
차디찬 새벽 공기가 폐허가 된 도시의 허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김서준은 한때 거대한 빌딩 숲을 이루었을 잔해들 사이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부서진 고가도로의 철골 구조물이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늘은 뿌연 먼지와 회색 구름에 가려 태양의 온기조차 느끼기 어려웠다. 손에 든 낡은 스캐너는 주기적으로 미약한 전파를 뿜어내며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젠장, 이런 날씨에 또 여기라니.”
서준은 중얼거렸다. 스캐너가 가리키는 곳은 한때 번화했던 도심의 한복판에 자리했던 거대한 백화점 건물이었다. 지금은 ‘철갑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거대한 금속성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철충의 성지’로 불리는 가장 위험한 구역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곳 외에는 비상 전력원을 구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의 은신처, 유일한 안식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배터리가 필요했다. 필사적인 생존 앞에서 ‘위험’이란 단어는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과거, 그는 따스한 햇살 아래, 사람들로 북적이는 백화점에서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갓 나온 게임기를 사기 위해 줄을 서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최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만 하면 전 세계의 모든 정보가 손안에 있었고, 굳이 이런 위험한 곳까지 와서 물건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그 기억은 서준의 머릿속에서 아득한 꿈처럼 멀어져가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자신이 정말로 과거에서 왔는지, 아니면 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미쳐버린 환각을 보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손에 박힌 흉터와 닳아빠진 장비들은 이 모든 것이 지독하게 생생한 현실임을 증명했다.
“끼이익… 찌지직…”
등 뒤에서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렸다. 서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철갑충의 움직임이었다. 육중한 금속 외골격을 가진 그것들은 폐허 속을 느리지만 끈질기게 기어 다녔다. 특히 소리에 민감해 조금만 움직여도 기계음 같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거대한 버스 잔해 뒤에 바싹 달라붙었다. 철갑충 한 마리가 폐허 속에서 부서진 빌딩의 외벽을 갉아먹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몇 분이 마치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철갑충은 먹이를 찾았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한곳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서준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백화점 건물로 향했다. 무너져 내린 입구는 거대한 턱처럼 벌어져 있었고, 그 안은 마치 거대한 동굴처럼 어두컴컴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썩은 먼지와 금속 녹이 뒤섞인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장은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한때 화려했을 디스플레이들은 모두 부서져 흉물스러운 잔해로 변해 있었다. 서준은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스캐너가 가리키는 곳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과거에는 수많은 차들이 오갔을 공간이지만, 지금은 침수되어 진흙과 오물로 가득 차 있을 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무너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로웠다. 녹슨 철골들이 삐걱거리고,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지하층에 도착하자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확 끼쳐왔다. 발목까지 차오른 흙탕물 속에서 그의 부츠가 질퍽거렸다. 휴대용 손전등을 켜자, 좁은 빛줄기가 사방을 비췄다. 물 위에 떠 있는 썩은 나무 파편들과 찢어진 천 조각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스캐너의 신호는 더욱 강해졌다. 물속 저편, 무너진 천장과 기둥 사이에 갇힌 오래된 비상 발전기 구역에서 미약한 전력 신호가 감지되고 있었다. 그곳까지 가려면 물에 잠긴 잔해들을 헤치고 지나가야 했다.
“하… 하필이면 이쪽이야.”
서준은 한숨을 쉬었다. 이곳의 물은 단순히 더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늪처럼 끈적하고, 어둠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이전에도 다른 생존자들이 이곳에서 ‘물귀신’이라 불리는 변이체에게 습격당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들은 물속에서 기습하여 사람을 끌고 가 버린다고 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발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빛이 닿지 않는 저편에서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스쳤다. 서준은 재빨리 손전등을 그쪽으로 비췄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였다. 찰박,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발목을 무언가가 강하게 붙잡았다. 차갑고 끈적한 감촉에 서준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들고 발밑을 내리찍었다.
“크아악!”
물속에서 섬뜩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끈적한 촉수가 서준의 다리를 감고 힘껏 끌어당겼다. 그는 물속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았다. 손전등이 물에 빠져 희미한 빛을 잃었다. 순식간에 암흑과 침묵이 서준을 집어삼켰다.
‘젠장! 당했다!’
그는 감각에 의존해 칼을 휘둘렀다. 끈적한 살점이 잘려 나가는 불쾌한 감촉과 함께 또 다른 비명소리가 들렸다. 촉수가 풀리고 서준은 물 밖으로 몸을 던지듯이 기어 나왔다. 간신히 손전등을 건져 올려 다시 불을 켰다.
빛이 비추는 곳에는 역겨운 형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문어처럼 여러 개의 촉수를 가진 생물체였다. 촉수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 같은 것이 달려 있었고, 축 늘어진 몸통에는 수십 개의 눈알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서준이 생각했던 ‘물귀신’의 실체였다.
“이 빌어먹을 괴물!”
서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귀신과 거리를 벌렸다. 놈은 잘려나간 촉수에서 녹색 피를 흘리며 뒤틀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 촉수가 다시 꿈틀거리며 자라나는 모습에 서준은 경악했다.
‘재생력이 빨라! 저대로는 답이 없어!’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에 무너진 기둥 잔해가 보였다. 서준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뛰어갔다. 물귀신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서준을 쫓아왔다. 여러 개의 촉수가 늪처럼 끈적한 물을 휘저으며 무섭게 다가왔다.
서준은 기둥 잔해 위로 뛰어올랐다. 물귀신이 미처 기둥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그 틈을 타 서준은 주머니에서 작은 금속 조각들을 꺼냈다. 그가 예전에 주운, 과거의 폭탄 파편들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물귀신의 여러 눈알 중 가장 크게 솟아오른 곳을 향해 던졌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물귀신의 눈알을 파고들자, 놈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물을 사방으로 튀겼다. 서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칼을 쥐고 기둥에서 뛰어내려, 괴물의 머리 가장 깊숙한 곳, 아마도 뇌가 있을 법한 부위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칼을 박아 넣었다.
꾸드득, 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괴물의 몸 전체가 경련을 일으켰다. 촉수들이 무기력하게 축 늘어지고, 녹색 피가 물속을 검게 물들였다. 물귀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서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있었다. 땀과 물에 젖은 몸에서는 쉰내가 났다.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스캐너를 들었다. 목적지는 바로 괴물이 죽은 곳의 뒤편이었다.
무너진 벽을 헤치고 들어가자, 작은 발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고 녹슨 발전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중 하나에서 스캐너의 신호가 가장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작은 전력 공급 장치, 바로 그가 찾던 배터리였다. 서준은 조심스럽게 배터리를 해체했다.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감이 스쳤다.
“됐다… 이걸로 적어도 한 달은 버틸 수 있어.”
배터리를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그는 여전히 철충의 성지 한가운데에 있었고, 이제 막 지옥을 탈출했을 뿐이었다. 발길을 돌려 어둠 속을 헤치고 나가는 서준의 등 뒤로, 방금 쓰러뜨린 괴물의 잔해가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의 고독한 여정은, 오늘 밤도 이렇게 피로 물들었다. 어쩌면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의 희미한 잔상과 함께 살아남는다는 그 단순한 사실뿐인지도 몰랐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다시 발걸음을 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