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어둠이 내린 도시는 거대한 유리와 콘크리트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덤 같았다. 수백, 수천 개의 빛나는 창문들이 마치 허공에 매달린 영혼들의 눈동자처럼 깜빡였다. 그 수많은 눈동자 중 하나, 17층에 자리한 민준의 아파트 창문 역시 여느 때처럼 고요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밤 10시 30분. 민준은 퇴근 후 씻고 나와 축축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향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지자, 오늘 하루 겪었던 직장 상사의 잔소리와 무의미한 회의들이 뇌리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듯했다. 테이블 위에는 방금 마시다 남은 맥주캔과 읽다 만 소설책이 놓여 있었다. 그는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그때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열쇠가 소설책 위로 떨어졌다. 민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제대로 놓아둔 것 같은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다시 열쇠를 제자리에 올렸다. 아마 피곤해서 잘못 놓았겠지.

TV에서는 심야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별 흥미 없는 내용이었지만, 적막한 아파트에 사람 목소리가 채워지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서늘한 기운이 팔을 스쳤다. 창문이 열렸나? 민준은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갔다. 닫혀 있었다. 환풍기라도 켜졌나 싶어 주방으로 가봤지만, 조용했다.

“젠장, 에어컨이라도 켜놔야 하나.” 그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위해 침실 문을 열던 민준은 눈을 비볐다. 분명 어젯밤에 얌전히 걸어두었던 셔츠가 침대 위에 구겨져 있었다. 바닥에는 벗어놓은 양말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 미쳤나 봐. 나 요즘 왜 이러지?” 피곤함에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며 셔츠를 다시 걸고 양말을 주웠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민준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싸한 냉기가 온몸을 감쌌다. 보일러를 켜둔 기억이 없는데도 집 안은 묘하게 따뜻했다가, 갑자기 찬 기운이 밀려왔다. 게다가 주방 싱크대에는 어젯밤 설거지통에 넣어두었던 컵 두 개가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던져놓은 것처럼.

“뭐지? 도둑인가?” 민준은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조심스럽게 집 안을 둘러봤다. 침실, 작은방, 거실. 모두 깨끗했다. 훔쳐간 물건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묘한 위화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기괴한 현상은 점점 대담해졌다. 샤워를 하는 동안, 욕실 문이 삐걱거리며 스르륵 열렸다. 민준은 비누 거품 묻은 손으로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다시 열렸다. 그는 일부러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그러자 밖에서 무언가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끼이익. 마치 손톱으로 나무 문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누구야?” 민준은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누구냐고!” 그는 샤워기를 끄고 벌거벗은 채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순간, 문이 안쪽으로 쿵, 하고 강하게 밀려들어왔다. 민준은 벽에 부딪히며 주저앉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멍하니 바라봤다. 춥지도 않은데 몸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그날 밤, 민준은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응시하는데, 갑자기 거실 쪽에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작은 유리 조각이 부딪히는 듯한 “쨍그랑!” 소리.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거실로 향했다.

거실 불을 켜자마자,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유리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액자 속 사진은 엉망진창으로 찢겨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소파 위 쿠션은 제자리를 벗어나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테이블 위 맥주캔은 찌그러져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난동을 부린 흔적이었다.

“젠장… 이건 꿈이 아니야.” 민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누가 그랬을까? 도대체 누가? 그는 CCTV를 설치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동시에 아무도 없는 이 공간에 무언가 *존재한다*는 섬뜩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다음 날, 민준은 밤새 엉망이 된 집을 청소하고 출근했다. 회사에서는 내내 멍한 상태였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꺼낼까 하다가, 미친 사람 취급당할까 봐 그만두었다. 홀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날 저녁, 민준은 퇴근하자마자 모든 불을 켜고 집 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신의 지갑을 발견했다. 분명 어젯밤 가방에 넣어두었는데. 지갑을 집어 들자, 그 아래에 놓여 있던 작은 종이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찢어낸 듯한 종이 위에 연필로 휘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나가지 마’

민준은 종이를 떨어뜨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이 덜덜 떨렸다. 누가, 누가 쓴 거지? 집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공포가 그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사를 알아봐야겠다. 당장이라도 이 집을 벗어나야 했다.

그가 부동산 앱을 켜려는 순간이었다. “탁!” 거실의 모든 불이 동시에 꺼졌다. 아파트는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밖에서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창문을 통해 스며들었다. 민준은 숨을 멈췄다.

“이봐! 장난치지 마!” 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리쳤다. “누구야? 나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엌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였다. 뒤이어 식탁 의자가 끌리는 소리, 냉장고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 마치 누군가 격렬하게 저항하는 듯한 소리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민준의 등 뒤에서, 차가운 숨결이 느껴졌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감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뒤에 서 있는 존재는 마치 그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것처럼 조용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민준은 간신히 말을 쥐어짰다.

침묵. 이윽고, 침실 쪽에서 삐걱,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침대 매트리스가 푹, 하고 꺼지는 소리. 마치 누군가 그곳에 앉은 것처럼. 민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그러자 거실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작은 화병이 스르륵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이내 민준의 눈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멈췄다. 그의 눈높이에서, 붉은색 꽃 한 송이가 꽂혀 있는 화병이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 너 뭐냐?”

화병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안에 담겨 있던 물이 바닥으로 또르르 떨어졌다. 그 물방울들이 카펫 위에 닿자마자, 기묘한 형태로 퍼져 나갔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물이 그리는 글씨는 하나였다.

‘외로워’

민준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외로워. 그 짧은 세 글자가 그의 모든 공포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이 모든 기괴한 현상은, 이 차가운 아파트에 갇힌 어떤 존재의 외로운 절규였던가.

화병은 다시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쿵,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놓였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모든 소리가 멎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민준은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이 집은 그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거실의 암흑 속에서, 그는 조용히 서 있었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창밖에서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빛은 이제 그의 아파트 안을 밝히지 못했다. 그의 아파트는, 이제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듯, 차갑고 고요하게 숨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