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뼈를 깎아내리는 듯한 심연의 회랑. 카이는 닳아빠진 랜턴을 높이 들었다. 낡은 철문은 오래전부터 닫혀 있었던 듯, 녹슨 신음을 토해내며 간신히 열렸다. 그 너머에는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원형 공간. 벽면을 따라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피처럼 붉게 새겨져 있었고,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수정이 맥박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정 주변으로는 핏자국처럼 번진 마법진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젠장, 여기가 ‘망각의 심장’인가.” 카이의 목소리는 제 입에서조차 낯설게 들렸다. 이곳은 지도상에도 없던, 심연의 가장 깊은 곳. 그들이 찾아 헤맨 루나의 ‘속박’을 풀 유일한 열쇠가 있을지도 모르는 장소였다.
그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흔들리더니 한 여인의 형상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루나였다. 밤하늘 같은 검은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미묘한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랜턴 불빛이 아슬아슬하게 번졌다.
“기척이 강해. 다른 것들의 흔적이 아니야.” 루나의 목소리는 그림자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팽팽한 긴장이 실려 있었다. “이곳의 수호자… 깨어났어.”
카이는 검집 위로 손을 올렸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울렸다. “결국 마주해야 할 상대인가.”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원형 공간의 천장에서 검은 액체가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액체는 바닥에 닿는 순간부터 기괴한 형체를 이루며 솟아올랐다.
“이건… 대체…” 카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검은 액체는 순식간에 거대한 인간형 괴물이 되었다. 온몸이 끈적한 어둠으로 덮여 있고,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손에는 뼈로 된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그 존재는 태초의 원념이 형상화된 듯, 오직 파괴만을 위한 듯했다.
<침입자… 사라져라…>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카이는 본능적으로 루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뒤로 물러서, 루나! 이건 내가 맡는다!”
하지만 루나는 이미 카이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채,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 실타래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안 돼, 카이. 저건 단순한 괴물이 아니야. 그림자 심연의… 파수꾼. 내가 직접 상대해야 해.”
파수꾼이 낫을 휘둘렀다. 끔찍한 속도로 공간을 찢어내며 카이에게 달려들었다. 카이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강철이 부딪히는 굉음이 동굴을 가득 채웠다. 충격파가 온몸을 흔들었다.
“크윽!”
카이는 뒤로 밀려났다. 파수꾼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리적인 충격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어둠’이 그의 정신을 좀먹는 듯했다.
그때, 루나가 움직였다. 그녀의 몸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뱀처럼 솟아올라 파수꾼을 휘감았다. 파수꾼의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둔화되었다.
“지금이야, 카이!”
카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검에 푸른색 오러가 타올랐다. 던전의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섬광처럼, 그는 파수꾼의 틈을 노려 돌진했다. 낫을 피하고, 방어막처럼 휘감긴 어둠을 찢어내며 그의 검이 파수꾼의 몸에 닿았다.
쉬이이익-!
검은 액체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올랐지만, 파수꾼은 금세 상처를 복구했다. 오히려 분노한 듯 더욱 거세게 공격해왔다.
“이런 젠장! 재생 능력이 너무 강해!” 카이는 비틀거리며 말했다. 랜턴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루나는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그림자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녀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더욱 창백해졌고,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흔들림 없었다.
“카이… 방법은 하나뿐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힘겹게 이어졌다. “내가 저 존재의 ‘뿌리’를 잠시 묶을게. 그 틈에… 저 검은 수정을 파괴해야 해. 저게 저 녀석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야.”
“뭐? 하지만… 그건 네 힘의 근원과도 연결되어 있을 텐데! 무리하면 네 존재 자체가 위험해져!” 카이의 눈에 공포가 스쳤다.
“시간 없어!” 루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검은 심연처럼 깊어졌다. 그녀의 몸을 휘감던 그림자들이 폭풍처럼 부풀어 올랐다. 공간의 어둠이 그녀에게 흡수되는 듯했다.
콰아앙-!
파수꾼이 거대한 그림자 촉수에 완전히 묶였다. 그것은 단순한 속박이 아니었다. 파수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둠의 에너지가 루나에게 역으로 흡수되는 듯했다. 고통에 찬 파수꾼의 절규가 찢어질 듯 울렸다.
루나의 온몸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림자 그 자체가 되려는 듯. 인간의 형상이 서서히 무너지며, 거대한 그림자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는 듯했다.
“루나! 안 돼! 그만둬!” 카이는 외쳤다. 그녀가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카이… 서둘러…! 제발…!”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한 속삭임이 되었다. 카이는 루나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은 수정으로 달려들었다.
번뜩이는 검날에 푸른 오러가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카이는 온몸의 힘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콰지직-!
검은 수정이 산산조각 났다.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그 순간, 파수꾼의 몸을 묶고 있던 그림자 촉수들이 힘을 잃고 사라졌다. 파수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연기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루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루나…! 루나!” 카이는 온몸에 힘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규가 섞여 있었다. 그는 주변을 미친 듯이 둘러보았다.
고요함이 찾아왔다. 끔찍했던 괴물의 울음소리도, 강철이 부딪히는 굉음도 모두 사라졌다. 오직 카이의 거친 숨소리만이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부서진 검은 수정의 파편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그림자였다. 그것은 마치 한 송이 꽃잎처럼, 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이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의 손을 뻗자, 그림자는 섬세하게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연약하고 희미했지만, 분명 루나의 형상이었다.
“루나…” 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그림자는 천천히 응축되더니, 마침내 예전의 루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창백했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가늘게 신음했다. “카이…”
카이는 루나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젠장… 내가 미쳤지. 너를 이렇게까지 위험하게 만들다니.” 그의 목소리는 자책으로 가득했다.
루나는 겨우 팔을 들어 카이의 뺨을 감쌌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니… 괜찮아… 카이… 나는 괜찮아… 네가… 네가 있어서….”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카이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고통과 사랑,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두려움을 초월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난… 괜찮아… 너만…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카이는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 금지된 사랑이 자신들을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다. 던전의 심연보다도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떨어뜨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그녀를 놓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그녀의 차가운 입술에 자신의 온기를 전했다.
그때였다.
그들의 머리 위, 부서진 천장 틈새로 아주 희미한 빛줄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빛줄기 사이로, 두 개의 붉은 점이 깜빡였다.
마치 먼 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눈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