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이진우는 오늘도 카페 하모니의 바리스타 카운터에 기대어 손님들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하모니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활기찼지만, 그의 눈빛에는 늘 지친 오후의 나른함이 묻어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커피 내리는 소리, 원두 갈리는 소리, 그리고 손님들의 웅성거림. 그 평범한 일상 속에서 진우는 아주 작은 일탈조차 꿈꿀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녀는 언제나 해 질 녘, 노을빛이 카페 안으로 길게 드리울 때쯤 나타났다. 머리칼은 붉은 노을을 담은 듯 오묘하게 반짝였고, 새하얀 피부는 얼핏 보면 비현실적일 만큼 고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금빛인지 호박색인지 모를 그 눈동자는 진우의 피곤한 일상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처음 그녀가 주문했을 때, 진우는 그저 예쁜 손님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면서 늘 희한한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얼음은 딱 세 개만 넣어주시겠어요? 너무 많으면… 좀 불편해서요.”

진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상한 요구사항을 가진 예쁜 손님’ 목록에 그녀를 추가하는 것 외엔 별다른 감상이 없었다. 그녀는 유소라라는 이름표를 달고, 그렇게 진우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소라는 매일 같은 시간에 카페를 찾았다. 언제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은 딱 세 개. 그리고 가끔 진우를 빤히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진우 씨는… 참 재미있는 냄새가 나네요.”

어느 날 그녀가 불쑥 내뱉은 말에 진우는 픽 웃어버렸다. “재미있는 냄새라니요? 혹시 커피 냄새 말씀하시는 건가요?”

소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음… 커피 냄새도 나지만, 뭔가…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 밤하늘의 별똥별 같다고 해야 하나.”

“하하, 별똥별이 어떤 냄새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분은 좋네요.” 진우는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표현 방식은 늘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가끔은 너무 고풍스러웠고, 때로는 아이처럼 순수했다.

그녀의 기묘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소라는 웬만한 소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으면서, 갑자기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예를 들어, 저 멀리서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하고 울자, 그녀는 마치 천둥소리라도 들은 듯 몸을 움찔하더니 창밖을 한참 응시했다. 그리고 마늘이 들어간 빵을 시식 코너에 두는 날에는, 그녀는 절대 카페에 들어오지 않았다. 멀찍이서 창문 너머로 진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거나,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는 그대로 돌아서곤 했다.

“소라 씨, 오늘 마늘빵 드시면 진짜 맛있는데… 왜 그냥 가세요?” 진우가 한 번은 붙잡고 물었다.

소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감싸 쥐었다. “으윽, 진우 씨! 그 냄새는 저에게… 치명적이에요. 마치 독가스 같아요!”

진우는 황당했지만, 그녀의 진심 어린 표정에 그냥 웃고 넘겼다. ‘참 별난 사람이야.’ 하지만 그녀의 별남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평범한 일상에 작은 구멍을 내어주고, 그 구멍으로 알 수 없는 재미있는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어느 비 오는 날, 카페 문이 갑자기 세게 열리며 고등학생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빗물에 미끄러져 진우가 갓 내려놓은 뜨거운 커피잔을 쳐버렸다. “악!” 진우가 뜨거움에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하는 순간, 옆에서 책을 읽던 소라가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였다. 진우가 채 인지하기도 전에, 엎질러질 뻔한 커피잔은 이미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 어어… 소라 씨?” 진우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소라를 쳐다봤다. 고등학생들도 놀라서 굳어 있었다.

소라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커피잔을 진우에게 건네며 말했다. “조심해야죠, 진우 씨. 이 따뜻함은 소중한 거니까.”

그녀의 동작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원래 그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진우의 눈에는 분명히, 그녀가 마하의 속도로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진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날 이후로 진우는 소라를 더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끔 자신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질 뻔하는 모습, 뜨거운 물을 맨손으로 만지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모습, 밤이 되면 유독 눈이 반짝이는 모습까지.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카페 마감 후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던 진우는 깜짝 놀라 그대로 멈춰 섰다. 카페 뒤편 골목, 어두운 가로등 아래에서 유소라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뒤통수에서, 하얗고 보송보송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 꼬리처럼 살랑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 소라 씨?” 진우가 헛기침하며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소라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뒤에서 펄럭이던 하얀 꼬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금빛 눈동자는 동공이 가늘게 세로로 갈라져 있었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그 모습에 진우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진우 씨… 어, 언제부터 거기에…?” 소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진우는 숨을 고르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방금요. 뭐 하세요, 여기서? 혹시… 꼬리 같은 거 보였는데…”

소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들켰다…”

“뭘요? 뭘 들켰다는 거죠?” 진우는 불안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비현실적인 상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설마… 외계인인가? 아니면… 웹툰에서 보던 그…?’

소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제 다시 평소의 부드러운 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진우 씨… 사실… 저는 인간이 아니에요.”

쿵. 진우의 심장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그의 망상 중 가장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저는… 구미호예요.”

“구미호요? 그, 그 설화에 나오는… 사람 간을 빼먹는다는?” 진우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깨에 멘 쓰레기봉투가 바스락거렸다.

소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우 씨! 그건 옛날이야기예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구닥다리 방법을 쓴다고…! 저는 이제 인간의 기를 먹어요. 커피 향처럼 따뜻하고 좋은 기를요.”

그녀의 말에 진우는 조금 안도했지만, 여전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럼… 그 꼬리는요? 아까 그건 뭐였어요?”

“그건 제… 본모습의 일부죠.” 소라가 한숨을 쉬었다. “아직 완벽하게 인간이 되지 못해서, 가끔 들키곤 해요.”

진우는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문득 그녀가 마늘을 싫어하고, 별똥별 같은 냄새가 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커피잔을 잡았던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카페에 매일 온 것도… 제 기를 먹으려고…?” 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라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그랬을지도 몰라요. 진우 씨의 기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거든요. 아주 맑고 따뜻해서… 자꾸 끌렸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진우 씨를 보는 게 좋아졌어요.” 그녀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진우 씨의 커피도 좋아하고, 진우 씨의 따뜻한 미소도… 모두 좋아요.”

진우는 그녀의 솔직한 고백에 잠시 말을 잃었다. 구미호라니. 종족을 초월한 사랑이라니. 이건 영화나 웹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게다가 구미호는 수명이 천 년, 이천 년인데, 인간은 겨우 백 년 남짓. 이건 명백한 금지된 사랑이었다.

“소라 씨…” 진우는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이건 좀…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소라의 눈빛에 실망감이 스쳤다. “역시… 그렇겠죠. 인간 세상에선 이런 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그녀는 돌아서려 했다.

“잠깐만요!” 진우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끝에 닿은 그녀의 피부는 놀랍도록 차가웠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머리가 좀 복잡하다는 뜻이었어요.”

소라가 다시 진우를 바라봤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다시 피어올랐다.

진우는 심호흡을 했다. ‘젠장, 그냥 예쁜 손님인 줄 알았더니… 이건 완전 판타지잖아.’ 하지만 동시에 그의 가슴 한편에서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차올랐다. 그녀의 별난 행동들이 이제는 모두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밤하늘의 별똥별 같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이제는 그 자체로 로맨틱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면… 소라 씨가 구미호인 건 좀 놀랍고, 무섭기도 하고, 심지어 황당하기도 해요.” 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소라 씨의 따뜻하고 포근한 기를 좋아한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소라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진우 씨…!”

“그러니까… 우리는 좀 더 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진우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직은 많이 어색하고, 어쩌면 나중에 엄청난 난관에 부딪힐지도 모르죠. 하지만… 최소한 소라 씨의 이상한 커피 취향을 이해해보려고 노력은 해볼게요.”

소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진우 씨, 제 취향은 이상한 게 아니라 섬세한 거예요!”

“네네, 구미호 아가씨. 얼음 세 개짜리 섬세한 취향이요.” 진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라의 머리칼은 부드러운 솜털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럼… 진우 씨의 기를 좀 더 가까이서… 자주 흡수해도 될까요?” 소라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흡수라니, 너무 노골적이네요. 그냥… 평범한 연인처럼 데이트하는 걸로 해요.” 진우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마늘은 없는 곳으로요.”

“콜!” 소라는 환하게 웃으며 진우의 품에 폭 안겼다. 그녀의 작은 체온이 진우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우는 그녀를 품에 안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소라의 동족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그는 피식 웃었다.

앞으로 그들의 사랑은 분명 평범치 않을 터였다. 얼음 세 개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어딘가 특별하고,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또 그만큼 특별한 맛이 나는 사랑이 될 것이라고 진우는 직감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카페 하모니의 뒤편 골목, 한 인간과 구미호의 기묘하고도 달콤한 포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