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차갑게 깎인 바람이 허물어진 도시의 뼈대 사이를 울부짖었다. 잿빛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폐허는 거대한 야수의 해골 같았다. 그 해골의 이빨 같은 잔해들 사이를 시아는 묵묵히 걸었다. 낡은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며 마른 몸을 감쌌지만, 한기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갈라진 입술을 혀로 축이며,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한쪽 팔에 묶인 녹슨 단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시아의 목소리는 허스키하게 갈라졌다. 며칠째 제대로 된 양식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발밑에 뒹구는 자갈들이 으스러지는 소리만이 텅 빈 거리를 채웠다. 한때 문명의 정점이었을 이 도시, ‘고대 크롤’은 이제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고층 빌딩들은 흉측하게 뒤틀린 채 서로를 지탱하며 서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메운 것은 무너진 잔해와 끝없이 기어오른 기괴한 덩굴 식물들이었다. 덩굴의 잎들은 독을 머금은 듯 검붉은 빛을 띠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시아는 망가진 건물 잔해를 타고 오르며 시야를 확보했다. 멀리서 검은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희망의 불꽃인지, 또 다른 절망의 흔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본능은 그 연기가 있는 방향으로 이끌렸다. 무언가 있다는 신호였다. 어쩌면 아직 타오르는 불씨가, 혹은 다른 생존자들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굶주린 짐승들의 은신처일 수도.

몸을 낮춰 잔해 속을 기어가는 시아의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다. 망토의 색은 주변의 바위와 먼지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생존 기술은 숨고, 숨고, 또 숨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것.

쉬익-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시아는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망가진 벽 뒤로 숨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감각은 익숙한 공포였다. 그것은 이 폐허를 지배하는 ‘변이체’ 중 하나였다. 거대하고 끔찍하게 뒤틀린 육체를 가진 짐승들.

끼이이익-!

금속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시아는 숨을 죽였다. 벽 틈새로 살며시 내다보니, 등에는 바늘처럼 솟아난 뼈 돌기가 돋아 있고, 여섯 개의 다리가 거미처럼 끔찍하게 움직이는 짐승이 그녀가 숨었던 곳을 지나치고 있었다. 피부는 시체처럼 푸르스름했고, 핏발 선 눈은 주위를 탐색하듯 번들거렸다. ‘가시 거미’라고 불리는 변이체였다. 한 번 발각되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들의 독은 육체를 녹이고 정신을 좀먹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시아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마저 들릴까 두려워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가시 거미는 잠시 멈춰 서서 공기 중의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려는 듯했다. 그 몇 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녀석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지, 다시 끔찍한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녀석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젠장, 젠장, 젠장…”

낮게 읊조리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도시의 중심부, 한때 거대한 쇼핑몰이었던 건물이었다. 그곳이라면 썩지 않은 보존 식량이나, 운이 좋다면 기능하는 정수 시설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쇼핑몰은 거대한 입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기괴한 형상으로 서 있었다. 표면은 부식되었고, 유리는 모두 깨져 있었다.

내부에 들어서자, 한낮인데도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희미한 햇빛이 천장의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며, 먼지 가득한 공기 속에서 춤추는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썩은 냄새, 금속의 비린내, 그리고 알 수 없는 독특한 악취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시아는 녹슨 진열대 사이를 지났다. 한때 화려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을 자리에는 부서진 파편들과 잿빛 먼지만이 가득했다.

“있어야 하는데… 제발.”

시아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뒹구는 간판, 무너진 천장, 그리고 벽에 피어난 기괴한 균류들을 훑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눈이 한 진열대 뒤에 가려진 작은 문에 닿았다. 직원의 휴게실이나 창고였을 것이다. 혹시?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다. 차갑고 녹슨 금속의 감촉. 삐걱이는 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문을 열었다. 내부에는 창문 하나 없는 어둠이 가득했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곰팡이 냄새가 그녀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하지만 그 냄새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보존 식량 특유의 인공적인 향이 느껴졌다.

시아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손전등을 켜자, 빛이 어둠을 가르고 내부를 밝혔다. 작은 공간이었다. 쓰러진 선반들, 뜯어진 상자들… 그리고 한 구석에 쌓여 있는, 기적처럼 온전한 상태의 보존 식량 상자들!

“하…!”

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달려가 상자를 집어 들었다.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지만, 포장은 찢어지지 않았다. 유통기한 따위는 무의미했다. 이 폐허에서는 썩지 않고 남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액자가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시아는 순간 얼어붙었다. 밖에서 느껴졌던 가시 거미의 움직임과는 차원이 다른 진동이었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젠장, 내가 미쳤지!”

안전하다고 생각한 게 오판이었다. 이 폐허에서 완벽한 안전지대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급하게 식량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끼야아아악-!

방금 전 가시 거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마치 찢어지는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건물 전체를 찢어발겼다. 진동은 더욱 거세졌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쇼핑몰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시아는 본능적으로 빛을 껐다. 다시금 짙은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 품에 안은 상자가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자 동시에 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살아야 한다.

문틈으로 살짝 내다보니, 메인 홀 중앙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쇼핑몰 천장을 뚫고 들어온 듯한 끔찍한 형상의 변이체였다.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팔이 진열대를 부수고 있었고, 뱀처럼 길게 늘어진 목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비늘 괴물’, 저들의 등장은 이 지역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다.

시아는 조용히 창고 문을 닫고, 반대편 벽에 기대어 섰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대로 기다리면 녀석은 지나갈까? 아니면 이 작은 창고까지 탐색할까?

쿵… 쿵… 쿵…

비늘 괴물의 발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듯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녀석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짐승의 끔찍한 악취가 창고 안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시아는 녹슨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이 작은 칼로 저런 거물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개처럼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으리라.

갑자기, 소음이 멈췄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침묵. 시아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녀석이 떠난 것일까? 아니면…

파아앙-!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창고 문이 박살 났다. 날아든 파편들이 시아의 얼굴을 스쳤다. 눈을 번쩍 뜨자, 비늘 괴물의 거대한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핏발 선 눈동자가 시아를 응시했다. 마치 먹이를 발견한 포식자처럼.

“크아아아악-!”

시아는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괴물의 촉수 같은 혀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핥았다. 끈적한 침이 바닥에 흥건히 떨어졌다. 그녀는 품에 안았던 식량 상자를 벽 쪽으로 던지고, 재빨리 몸을 낮춰 괴물의 거대한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단검을 든 손으로 괴물의 비늘이 덜 덮인 관절 부분을 무작정 찔렀다.

서걱!

단검이 얇은 살가죽을 찢었다. 괴물은 고통에 찬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몸을 크게 휘둘렀다. 꼬리가 휘청이며 선반들을 강타했고, 내용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몸으로 좁은 통로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이 미친 괴물!”

괴물은 거대한 몸을 이끌고 그녀를 쫓아왔다. 쇼핑몰 내부가 괴물의 난동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잔해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벽이 갈라졌다. 시아는 앞만 보고 달렸다. 다리가 찢어지고 팔이 긁혔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녀를 지배했다.

마침내, 그녀는 무너진 건물의 입구에 도달했다. 거대한 잔해들 사이의 좁은 틈. 괴물은 그 틈을 지나올 수 없었다. 괴물의 거대한 얼굴이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려 했지만, 굳건한 잔해들이 이를 막아섰다. 괴물은 분노에 찬 울음소리를 냈지만, 시아는 이미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황량한 도시의 거리로 나온 시아는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았다. 비록 피투성이가 되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잔해 속에 떨어진 식량 상자를 향했다. 다행히도 상자는 멀쩡했다.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켜 상자를 주웠다. 낡은 망토를 덮고 안전한 은신처를 찾았다. 무너진 빌딩의 지하에 있는 작은 공간.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건조된 육포와 딱딱한 비스킷 몇 개. 그리고 마실 수 있는 정제된 물 몇 병. 이것은 적어도 며칠을 버틸 수 있는 양식이었다. 시아는 허겁지겁 육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짠맛과 고기 특유의 비린내가 섞인 익숙한 맛. 미각조차 마비될 정도로 굶주렸던 그녀에게는 천상의 맛이었다.

어둠 속에서, 시아는 작게 흐느꼈다. 그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안도감과, 그리고 이 끝없는 생존의 무게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곧 눈물을 닦고, 단단히 입술을 다물었다.

“젠장… 죽을 순 없어.”

창밖은 여전히 잿빛 하늘 아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시아는 알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도, 생명은 기어코 숨을 쉬고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 자신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을. 그녀의 눈빛은 비록 지쳐 있었지만,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강렬하게 타올랐다. 내일도, 또 다른 하루가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