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내 이름은 지훈, 30대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서울 한복판의 낡았지만 깔끔하게 리모델링된 아파트 1303호에서 혼자 산다. 이 아파트가 처음부터 기묘한 기운을 풍겼던 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이겠지.

처음엔 사소했다. 현관 키걸이에 걸어둔 차 키가 자꾸 식탁 위에서 발견되거나, 분명 잠갔다고 생각한 방문이 새벽에 스르륵 열려 있는 식이었다. 처음엔 건망증이 심해졌나 싶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느 날은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거실 탁자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침대 머리맡에 가 있었다. 소름이 돋았지만, 또 피곤해서 그랬겠지, 혼잣말하며 애써 외면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침실에 놓아둔 컵이 거실 바닥에 깨져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더 이상 내 건망증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컵은 깨끗하게 깨져 있었고, 마치 누군가 던진 것처럼 파편이 넓게 흩어져 있었다.

“누구… 없어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순간, 거실 창문에서 쾅,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용기를 내어 다가갔지만,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3층 높이에서 무언가 부딪힐 리도 만무했다.

그때부터였다. 밤이 되면 집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나 보일러 소리와는 전혀 다른,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었다. 긁는 소리,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아주 희미한 울음소리까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일상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수아야, 나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

퇴근 후 술 한잔하며 유일한 친구인 수아에게 하소연했다. 수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잔을 기울였다.

“지훈아,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혹시… 스트레스성 환청이라든가?”

“아니야, 그게 아니야. 오늘은 있잖아, 아침에 일어나니까 거실 벽에 낙서가 되어 있는 거야. 분명 내가 어제 잠들기 전에 봤을 땐 아무것도 없었거든? 애가 그린 것 같은 그림, 삐뚤빼뚤한 크레파스 집 그림….”

수아의 눈이 커졌다.

“뭐? 크레파스? 지훈이 너 혼자 살잖아. 집에 애도 없고.”

“그러니까! 그래서 지웠어. 혹시나 싶어서 벽지 다시 살펴보니까, 예전에 낙서 자국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 몰라, 내가 미친 건가?”

“지훈아, 일단은 그 집에서 나와서 며칠만이라도 나랑 같이 지낼까? 너무 힘들어 보여.”

수아의 걱정이 고마웠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 모든 게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어디로 도망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알 수 없는 존재가 나를 붙잡아두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는데, 갑자기 거실에서 ‘쨍그랑’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섰다. 이제는 직접 눈으로 봐야 했다.

거실로 나섰을 때, 나는 숨을 들이켰다. 탁자 위 액자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액자 속 사진은 나와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이건… 너무하잖아.”

그때였다. 쿵, 쿵, 쿵. 마치 윗집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을 끌고 가는 듯한 소리가 천장에서 들렸다. 아니, 천장에서 들리는 게 아니었다. 바닥에서, 벽에서,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해! 내가 뭘 어쨌다고!”
“네가 그랬잖아! 내가 하지 말랬잖아!”

남자와 여자의 다툼 소리였다. 마치 내 귓가에 속삭이는 듯 생생했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환청일 거라고, 악몽일 거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경악했다.

내 아파트가 아니었다.

벽지는 낡고 색이 바래 있었다. 가구들은 오래되고 투박했다. 내가 살던 모던한 인테리어는 온데간데없었다. 액자 대신 낡은 시계가 걸려 있었고, 그 밑에는 낡은 인형과 장난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분명 같은 1303호인데, 다른 시대의 1303호였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 눈앞에서 한 여자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낡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낡은 곰 인형을 안고 서 있는 어린아이의 형체가 있었다. 희미하고 반투명했지만, 분명히 아이였다. 아이는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여자는 아이를 보지 못하는 듯했다.

“엄마… 울지 마….”

아주 작은 목소리, 하지만 내 귓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아이는 여자의 무릎에 기대려 했지만, 여자는 그저 투명한 허공만을 붙잡고 흐느낄 뿐이었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아이를 만지려 했다. 닿는 순간, 아이의 형체가 파르르 떨리더니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색이 바랜 벽지와 낡은 가구들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다시 내가 알던 1303호로 돌아왔다. 액자는 여전히 바닥에 깨져 있었고, 내 손은 허공을 움켜쥐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식는 듯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시간 여행? 과거?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현관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어둠이 밀려들었고, 그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타박… 타박… 타박…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나는 공포에 질려 한 발짝,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는 순간, 그 발소리가 내 바로 앞에 멈췄다.

그리고 내 발치에서, 아까 거실 벽에 그려져 있던 것과 똑같은 삐뚤빼뚤한 크레파스 집 그림이 그려진 종이가 발견되었다. 그림 옆에는 서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엄마는 왜 나를 못 봐?’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이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들은, 과거에 이 집에서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의 잔재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엄마에게서 잊혀진 채 과거에 갇혀버린 어린 영혼이 있었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그 아이의 절규이자 존재를 알리려는 몸부림이었고, 내가 본 시간의 균열은 그 아이가 갇힌 시간 속으로 내가 잠시 끌려들어 간 것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내 뺨을 스쳤다. 마치 어린 손가락이 내 얼굴을 더듬는 듯한 느낌이었다. 더 이상 공포스럽지 않았다. 그보다는 깊은 슬픔과 연민이 밀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혀 그 그림을 주워 들었다.
“내가… 봐줄게.”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자 집안을 짓누르던 모든 기괴한 소음과 싸늘한 한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파트는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마치 이 세상에 나와 그 어린 영혼, 단둘이 남은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제 나는 이 아파트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영원히 함께 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단지, 막연한 슬픔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