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는 오늘도 키보드 위를 헤매는 손가락 끝에서 먼지 냄새를 맡았다. 눅눅하고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아니라, 건조하고 텁텁한 오래된 종이와 잊혀진 활자들의 냄새. 박사 학위를 딴 이후, 그의 삶은 거대한 박물관의 먼지 쌓인 수장고와 다를 바 없었다. 한때는 고대 언어학계의 떠오르는 샛별이라 불렸지만, 이제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채 세상의 시선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가 매달렸던, ‘심연 아래 잠든 자들의 언어’에 대한 가설은 학계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는 그렇게 홀로 남겨졌다. 그의 유일한 벗은 낡은 서적들과, 그 안에 잠든 죽은 문자들뿐이었다.
작업실 창밖은 회색빛 도시의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풍경이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낡은 태블릿 PC 화면으로 돌렸다. 몇 년째 붙들고 있는 고대 문자의 잔해들.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형문자와 추상적인 기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모두 그가 상상했던 ‘잃어버린 문명’의 흔적들이었다.
딩동.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진우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삶에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방문객은 거의 없었다. 택배 기사겠지. 그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 앞에 놓인 것은 큼지막한 나무 상자 하나였다. 투박하게 포장된 상자 위에는 발신인 정보도 없이, 오직 그의 이름과 주소만이 적혀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작업실로 들고 들어왔다. 커터칼로 테이프를 끊자, 안에서 또 다른 포장재가 드러났다. 겹겹이 쌓인 천과 스티로폼을 걷어내자, 마침내 안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돌이었다. 아니, 돌 조각. 한 손에 들기 묵직한 크기의 육각형 돌 조각이었다. 표면은 오랜 세월에 마모된 듯 거칠었지만,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진우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그가 수년간 연구했던, 그러나 단 한 번도 실물로 마주한 적 없는, ‘심연 아래 잠든 자들의 언어’였다. 그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고대 문명의 문자들이, 그의 눈앞에 실재하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믿을 수 없었다. 학계에서 자신을 비웃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거짓말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그의 가설이 틀리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돌 조각 아래에는 낡은 양피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잉크가 번진 듯 희미하게 적힌 단 세 줄의 문구.
*그들의 심장이 다시 뛸 준비를 마쳤다.*
*서두르지 않으면, 너 또한 잊힐 것이다.*
*그곳의 빛은 어둠 속에 잠들었으나, 이제 다시 깨어날 때가 되었다.*
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들의 심장’? ‘잊힐 것이다’? 마지막 문구는 마치 하나의 암호 같았다. 돌 조각을 든 손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한 학술적인 발견이 아니었다. 어떤 거대한 그림자, 거대한 비밀이 자신을 이 심연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즉시 돌 조각의 문양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의 뇌는 수년간의 훈련으로 단련된 고대 문자 해독 기계처럼 작동했다. 손가락이 미친 듯이 자판 위를 오갔고,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가설과 데이터가 번개처럼 교차했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는 돌 조각과 씨름했다. 그리고 새벽이 동터올 무렵, 마침내 그는 그 조각의 의미를 파악해냈다.
“거울은 그림자를 품고, 그림자는 문을 연다. 문의 열쇠는 피에 잠겨 잠들었으니, 빛이 닿지 않는 심연에서 그림자를 보리라.”
의미를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단어, ‘심연’. 그리고 첫 문장의 ‘거울’과 ‘그림자’. 이것은 단순한 시구가 아니었다. 하나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오래된 전설의 파편들.
학계에서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가 끈질기게 파고들었던, 어떤 존재에 대한 기록들. ‘세계의 심연’이라 불리던, 그림자처럼 사라진 지하 도시의 전설. 그곳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지식과 위험을 품고 있다고 전해졌다.
그는 작업실 한편에 굴러다니던 낡은 지도를 꺼냈다. 수많은 선과 기호가 복잡하게 그려진 고지도였다. 심연에 대한 자료를 모으던 중, 우연히 발견했던 파편적인 지도였다. 한 점, 오랫동안 의미를 알 수 없었던 표시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표시는 기묘하게도 돌 조각의 문양과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시 아래에는, 희미하게, ‘거울의 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게… 정말이었단 말인가?”
진우의 목소리가 텅 빈 작업실에 낮게 울렸다. 그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 이건 학계의 인정을 넘어선 문제였다. 이것은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지의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그들의 심장’이 다시 뛸 준비를 마쳤다는 문구.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깨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는 손에 든 돌 조각을 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잊혀진 문명, 지하 유적, 그리고 누군가의 경고. 이 모든 것이 그를 이 심연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과거의 굴욕과 현재의 고립을 벗어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아니, 어쩌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지도 모를 미친 짓.
그는 지도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있던 허리가 뻐근하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의지는 이미 굳건했다. 배낭을 꺼내들었다. 며칠 치 식량, 물, 손전등, 그리고 오래된 녹음기. 최소한의 준비물이었다. 그의 손이 멈칫한 곳은, 낡은 권총 한 자루였다. 언젠가 위험에 대비해 준비해뒀던 물건.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권총을 배낭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건 탐험이 아니었다. 모험도 아니었다.
이것은… 진실을 향한 발버둥이자, 자기 자신을 향한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는 창밖의 회색빛 도시를 잠시 응시했다. 밤사이 내린 이슬비로 촉촉해진 아스팔트 위를 차들이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잠들었던 빛. 이제 깨어날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