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피할 수 없는 운명, 혹은 삐걱대는 첫 만남**
“다음 경기! 매화문(梅花門)의 매화 대 천광문(天光門)의 철룡!”
우렁찬 호명 소리가 거대한 무투장을 가득 채웠다. 사방을 둘러싼 관중석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란과 함께 기대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거창한 명분 아래 모인, 이름하여 ‘천하제일 무투회’. 무림 각 문파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총출동한 이 대회의 열기는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보다 뜨거웠다.
나는 조용히 대기석에서 일어섰다. 내 이름, 매화. 사람들은 내가 가진 재능에 비해 너무나도 소박하고 수수한 이름을 가졌다며 의아해했지만, 우리 문주님께서는 “매화는 한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꿋꿋하게 피어나는 법”이라며 내게 이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 말씀처럼, 나는 지금 이 거대한 무대의 중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휴, 매화 아가씨는 여전히 새침하네. 저런 아리따운 얼굴로 어떻게 철룡을 상대하려나 몰라.”
“하긴, 철룡은 웬만한 장정 서넛은 너끈히 때려눕힌다던데.”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가녀린 외모 탓에 대련 전에는 늘 이런 평가를 받곤 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줄 테니까. 나는 낡았지만 길들여진 내 도복 자락을 한 번 고쳐 잡았다. 등 뒤로 매화문 문양이 바람에 살랑였다.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상대, 천광문의 철룡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처럼 거대한 덩치에 근육이 울퉁불퉁 솟아 있었다. 그가 으르렁거리며 팔뚝을 휘두르자, 마치 맹수가 포효하는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크하하! 꼬맹이가 어디 감히 무투회에 발을 들여? 얼른 집에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그의 조롱 섞인 외침에 관중석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철룡을 응시했다.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저는 젖 대신 매화차를 마시고 자랐습니다. 혹시 경기 후에 제 몸에 밴 차 향이 그리우시다면, 한 잔 대접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내 차분한 대답에 철룡은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얼굴을 붉히며 더욱 거칠게 소리쳤다.
“건방진 꼬맹이! 내 주먹 맛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자!”
심판의 시작 신호와 함께 철룡은 거대한 몸을 이끌고 맹렬히 돌진했다. 그의 육중한 주먹이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잎처럼 가볍게 몸을 틀어 그의 공격을 스쳐 지나갔다.
‘흐음, 힘은 좋지만 너무 직선적이야.’
철룡은 연이어 주먹과 발길질을 날렸지만, 그의 모든 공격은 허공을 가르거나 내 옷자락만 스칠 뿐이었다. 나는 한 송이 매화가 바람에 춤추는 듯한 우아한 움직임으로 그를 농락했다. 몸을 낮춰 그의 겨드랑이를 파고들고, 그의 팔을 살짝 밀어 균형을 흐트러뜨렸다.
“이, 이 비겁한 년! 정면으로 승부하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다니!”
철룡의 얼굴은 이미 분노와 당황스러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씩 웃었다. “무술에 비겁함이란 없습니다. 오직 효율적인 움직임만이 있을 뿐.”
그리고 그때였다. 그의 공격을 흘려내며 옆으로 돌아선 나는, 가볍게 손을 뻗어 그의 명치 끝을 톡 건드렸다.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접촉이었지만, 그 순간 철룡의 거대한 몸이 움찔하더니 굳어버렸다.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입은 벌어진 채 닫히지 않았다.
털썩.
거대한 몸집의 철룡이 마치 나무토막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경기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가 이 어이없는 장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잠시 후, 심판이 정신을 차리고 승리를 선언하자 그제야 관중석에서는 폭발적인 환호와 함께 “매화! 매화!”를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에도 내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다. 그저 다음 경기에 대비해 몸을 풀러 갈 생각이었다.
복도를 따라 걷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저 아가씨 대단하네.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았어.”
“그러게. 천광문 철룡을 저리 쉽게 제압할 줄이야. 매화문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문파인데 말이야.”
두런두런 이야기가 오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화려한 자수 무늬가 수놓아진 도포를 걸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수려한 외모, 자신감 넘치는 미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는 아우라. 천룡문(天龍門)의 차기 문주, 천무였다. 그는 무림의 아이돌이자, 이번 무투회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점쳐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나와는 여러 번 부딪힌 악연 아닌 악연이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천무는 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 있던 천룡문의 무사가 내게 길을 비켜주려 하자, 천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 매화 아가씨. 방금 경기, 실로 볼만했소.”
그의 칭찬은 칭찬이라기보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천무 도련님. 혹시 천룡문의 무술은 상대가 쓰러지면 발로 밟고 지나가도록 가르칩니까? 제가 길을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천무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의 무사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하하, 아가씨는 여전히 솔직하고 직설적이구려. 좋소, 그 당돌함. 하지만 말솜씨는 아직 내게 못 미치는군. 그리고 내가 언제 당신의 길을 막았다고 그리 오해하는지 모르겠소.”
천무는 여유롭게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나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길을 막지 않았다면, 굳이 저에게 말을 걸 이유도 없었겠지요.”
나는 그에게 짧게 고개를 까딱하고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천무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래도 이번 무투회에서 당신의 실력은 눈에 띄게 성장한 것 같더군. 매화문이 대체 어디 있는 문파인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 실력이라면… 언젠가 내 앞에서 설 기회도 오겠지.”
그의 말에는 오만함이 가득했다. ‘언젠가’라는 표현 속에는 아직 자신과 겨룰 수준이 아니라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천무를 돌아보았다. “천무 도련님은 이미 저를 앞에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가 천룡문의 문주님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것도, 언젠가는 제가 이 대회의 우승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가서 저에게 존대해 주시면 될 겁니다.”
내 예상치 못한 반격에 천무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눈빛에 일순간 흥미로운 빛이 스쳤다.
“호오, 재미있군.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지는군.”
나는 빙긋 웃었다. “저의 자신감은 차 향처럼 은은하지만 오래갑니다. 천무 도련님의 오만함처럼 휘발되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복도 끝까지 걸어가는 동안, 뒤통수로 천무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저 잘난 맛에 사는 도련님은 여전하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음 경기 준비에 집중했다. 이 무투회는 단순히 무림의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가 아니었다. 승자에게는 ‘천하제일 무학 비급’이 주어지며, 그 안에 담긴 절대 무공을 통해 세상을 다스릴 막강한 권한까지 부여받는다고 했다. 무림 전체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문주님께서는 무투회에 참가하기 전 내게 단 한마디만 당부하셨다. “매화야,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된다. 다만… 네가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어라.”
그래. 나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천무 도련님 같은 잘난 사람의 콧대를 꺾는 것쯤이야, 소소한 즐거움이랄까.
나는 복도의 꺾인 모퉁이를 돌아 다음 대기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또 어떤 인연, 혹은 악연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 무투회가 나의 조용한 삶을 뒤흔들 것이며, 어쩌면 천무 도련님의 삶까지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과연 이 천하제일 무투회의 끝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흥미진진해질 것만은 분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