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운명이 걸린다는 말은 언제나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무림의 모든 고수가 삼천년 만에 열리는 ‘구천쟁패(九天爭霸)’의 장막 아래 모여들었을 때, 그 말은 더 이상 허황된 낭만이 아니었다. 아홉 하늘에 걸쳐 내려오는 거대한 위협, 일찍이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재앙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강호. 이 대회의 승자만이 그 천하의 기운을 다스려 이 멸망의 운명을 뒤집을 수 있다고 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칠성봉(七星峰) 중턱에 마련된 거대한 비무장. 수천 년 된 고목들 사이로 펼쳐진 웅장한 무대 위에는 각 문파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북천문의 현무신군, 남궁세가의 검존 남궁무영, 소림사의 혜광대사… 이름만 들어도 강호가 떨릴 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사이, 비무장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허름한 푸른 도포에 아무런 문양도 없는 낡은 목검 한 자루를 허리에 찬 사내. 그의 이름은 청우(靑雨). 그가 어떤 문파 소속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강호에는 그저 ‘떠도는 구름’이라 불릴 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맑았으나, 그 속에는 심연처럼 깊은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대회의 개막을 알리는 천둥 같은 북소리가 칠성봉을 뒤흔들었다. 이내 묵직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제1회 구천쟁패, 이제 시작한다!”
첫 대진표가 발표되자 여기저기서 술렁거렸다. 청우의 이름은 초반 대진에 있었다. 그의 상대는 호북성 무림맹의 실세 중 하나인 광풍문의 장문, 서문정(西門正)이었다. 별호가 ‘광풍검’인 그는 말 그대로 폭풍 같은 검술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
서문정이 비무대에 오르자 장내가 술렁였다. 화려한 금사 갑옷에 번개 문양이 새겨진 검을 든 그는 위풍당당했다. 그는 청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웃듯이 말했다.
“꼬마야, 여긴 네가 나들이 나올 곳이 아니다. 어서 돌아가서 젖병이나 더 물고 오는 게 어떠냐?”
청우는 그의 조롱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비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걸음은 너무나도 평온하여 마치 산책하는 듯했다.
“선배님, 제 이름은 청우입니다. 나이는 비록 어리나, 이곳에 온 뜻은 선배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청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묘한 울림이 있었다.
서문정은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어디 네놈의 그 목검으로 내 검을 막아낼 수 있을지 보자!” 그는 일순간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허리춤의 번개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검기가 폭풍처럼 서문정의 몸을 휘감았다.
“광풍십삼식(狂風十三式)!”
서문정의 검이 번개처럼 작렬했다. 그의 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뻗어나가며 열세 개의 궤적을 동시에 그렸다. 마치 수십 자루의 검이 동시에 달려드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맹렬한 공격이었다. 비무장 바닥의 견고한 돌들이 그의 검기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저 정도의 검기를 과연 저 목검 든 젊은이가 막아낼 수 있을까? 모두가 청우의 패배를 예상했다.
그러나 청우는 달랐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검광 속에서 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목검을 뽑지도 않고, 그저 양손을 모아 가볍게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는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피어났다.
“어리석은 놈!” 서문정은 더욱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청우의 심장을 향해 직진했다.
그 순간, 청우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양손에서 피어났던 푸른 빛이 갑자기 폭발하듯 비무장 전체를 감쌌다. 그것은 검기도, 내공도 아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기운이었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잔잔한 안개가 깔리는 듯했다.
“이것은…!” 서문정은 경악했다. 그의 맹렬한 검기가 청우에게 닿는 순간, 마치 허공에 부딪히는 것처럼 힘없이 흩어졌다. 그의 검은 청우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검술이 가진 사나운 기운들이 청우의 푸른 기운에 부딪히자마자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청우는 느릿하게 목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목검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낡은 나무 조각일 뿐이었다. 그는 그 목검을 마치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경지인가…!” 칠성봉 정상에 앉아 대회를 관전하던 어느 노승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경외로 가득했다.
청우의 목검이 움직이는 순간, 공간 자체가 묘하게 일그러지는 듯했다. 그의 검은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느렸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 모든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는 듯했다. 서문정의 모든 공격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그의 목검은 어느새 서문정의 번개검 아래를 파고들어 그의 손목을 가볍게 스쳤다.
챙그랑!
강철로 만들어진 서문정의 번개검이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서진 칼날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서문정은 자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지만, 그의 손목은 마치 힘줄이 끊어진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청우를 멍하니 바라봤다.
“나의… 나의 검이…!”
청우는 목검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는 서문정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선배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경기 결과가 발표되자, 비무장은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곧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강호의 거목 중 한 명인 광풍검 서문정이, 이름 없는 젊은이의 목검 한 자루에 허무하게 패배한 것이다. 그것도 단 일격에.
비무장을 내려오는 청우의 뒷모습은 여전히 평온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 대회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는 천하의 운명이 무겁게 놓여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목검은 단지 시작일 뿐,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것을.
누군가 비무장을 내려오는 청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흥미롭군. 목검으로 검을 부수다니. 이 정도 경지라면 내 다음 상대가 될 자격은 있겠어.”
그는 바로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이자 강호 젊은 검객들 중 최고라 불리는 남궁무진(南宮無眞)이었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허리에는 천하에 세 자루밖에 없다는 전설의 명검, 칠성보검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청우는 말없이 남궁무진의 눈을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비무장 전체를 감쌌다. 다음 대결이, 강호의 운명을 가를 진정한 시작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했다.
천하의 운명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이 대회 위에 위태롭게 놓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