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조각: 잿빛 도시, 보라 눈동자
숨이 턱 막혔다. 낡은 방독면 안으로 밀려드는 공기는 텁텁하고 거칠었지만, 그나마 마스크가 없었다면 질식했을 것이다. 한때 마천루가 즐비했던 도시의 중심부는 이제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이 되어 있었다. 비틀린 철골들이 앙상한 뼈대처럼 하늘을 찔렀고, 유리 파편들은 밟을 때마다 불길한 소리를 냈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폐수는 잿빛 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지우는 잔뜩 웅크린 채 폐허 더미 속을 뒤졌다. 낡은 배낭은 어깨를 짓눌렀고, 허리춤에 찬 칼의 손잡이가 차갑게 느껴졌다. 이곳은 한때 번화했던 상가 건물이었으리라 짐작되는 곳이었다. 붕괴된 천장 너머로 희미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그 빛마저도 음산함을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지우의 눈은 혹시라도 먹을 것이나 쓸 만한 물건이 있을까 싶어 빠르게 움직였다. 깡통, 붕대, 작동하는 손전등.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생존을 위한 필수품들이었다.
“젠장, 또 아무것도 없어.”
혼잣말이 방독면 안에서 작게 울렸다. 며칠째 물만 겨우 축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굶어 죽을 터였다.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우는 무너진 선반을 걷어냈다. 그때였다.
*크르르르…*
낮게 깔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지우는 얼어붙었다. 덩치를 키운 변이 동물들은 폐허의 가장 큰 위협이었다. 놈들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으며, 무엇보다 지능적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방독면 렌즈 너머로 보이는 시야는 더욱 좁아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십 미터쯤 떨어진 곳, 어두운 기둥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늑대와 비슷하지만 털은 검은 잿빛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눈은 붉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이빨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야수’라고 불리는 변이체 중 하나였다.
지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야수는 이미 지우의 냄새를 맡은 듯했다. 놈의 목울대에서 다시 한번 위협적인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졌고, 야수는 마치 먹잇감을 가지고 놀듯 서서히 그림자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오늘은 정말 끝인가. 지우는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녹슬었지만 날카로운 칼날이 한 줄기 빛을 반사했다. 그래, 여기서 죽더라도 싸우다 죽을 것이다.
야수가 낮은 자세로 몸을 숙였다. 달려들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녀석의 붉은 눈이 지우를 꿰뚫었다. 일 초, 이 초…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수가 맹렬하게 지우를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몸뚱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육식동물의 포악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크아아악!”
지우는 눈을 질끈 감고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야수의 발톱이 지우의 몸을 찢으려던 바로 그 순간…
*휘이이잉—*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야수의 맹렬한 돌진이 갑자기 멈칫했다. 녀석은 흐느적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거대한 몸뚱이가 쿵,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지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야수는 쓰러져 있었다. 녀석의 목에는 검고 날카로운 파편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피는 뿜어져 나오지 않았지만, 녀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듯했다.
무슨 일이지? 지우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차가운 기척이 느껴졌다.
*정말… 인간이구나.*
목덜미에 차가운 숨결이 닿았다.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울림이 지우의 귓가에 맴돌았다. 방독면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소리였다.
지우는 공포에 질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거기에는 사람이 아니었다.
키는 지우보다 훨씬 컸다. 마른 듯하면서도 강인한 근육이 느껴지는 몸매는 매끈하고 유연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피부색이었다. 밤하늘처럼 짙은 남색이었다. 머리카락은 길고 은빛으로 빛났으며, 바람 한 점 없는 폐허 속에서 홀로 신비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눈.
그 눈은… 마치 보라색 잉크를 풀어놓은 듯 깊고 투명했다. 동공은 수직으로 길게 찢어져 있어 고양이 같으면서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를 담은 듯했다. 야수에게 박혀 있던 검은 파편은 이 존재의 손에 들려있는 무기와 똑같았다. 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단단한 흑요석 같은 것이었다.
존재는 지우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생명체. 지우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종족’이었다.
그때, 존재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지우의 방독면을, 그리고 그 안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살고 싶어 하는구나. 역겨운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음성이 다시 한번 지우의 뇌리를 강타했다. 방독면의 미세한 틈새로 소리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지우는 이 존재가 자신의 생각을 읽는 것인지, 아니면 직접 말을 건네는 것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을 경멸하는 듯했다.
하지만… 왜 야수를 죽였지? 왜 나를 죽이지 않았지?
지우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존재 앞에서는 칼 한 자루 든 인간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먼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길고 지독한 정적. 존재의 보라색 눈동자는 변함없이 지우를 응시했다. 그 시선은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기심 같은 것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우는 그 눈 속에서 찰나의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보았다 착각했다.
이곳에 홀로 남겨진, 인류의 마지막 흔적 같은 존재인 자신. 그리고 이 비현실적인, 신비롭고도 위험한 존재.
존재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검은 무기가 지우의 심장을 향했다. 지우는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눈을 감으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보라색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기는 지우의 심장에 닿지 않았다. 대신, 존재는 지우의 방독면을 감싸 쥐었다. 차갑고 단단한 손가락이 방독면의 연결 부위를 더듬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방독면을 벗겨냈다.
거친 바깥 공기가 폐 깊숙이 밀려들어왔다. 지우는 기침을 터뜨렸다. 그 순간, 존재의 보라색 눈동자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인간의 얼굴을 마주한 존재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
*네 눈은… 나약하구나.*
목소리가 지우의 뇌리에 직접 박히는 듯했다. 존재는 그 말과 함께, 마치 처음 보는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지우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손끝이 피부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존재는 아무 말 없이, 마치 그림자처럼 바람처럼 소리 없이 돌아서서 폐허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이었다.
지우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손끝에 남아있는 차가운 감촉과, 뇌리에 박힌 보라색 눈동자와,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던 그 ‘다른’ 종족의 시선만이 뚜렷했다.
살아남았다. 하지만 왜?
폐허 속, 잿빛 도시의 한가운데서 지우는 마치 폭풍 한가운데 버려진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눈앞의 죽은 야수와 방독면을 벗겨낸 손길, 그리고 그 보라색 눈동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공포였을까, 아니면…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시작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