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회색빛 콘크리트 사이로는 이름 모를 넝쿨들이 거미줄처럼 뒤엉켜 생명의 끈질김을 과시하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텅 빈 창문 구멍들을 휘돌며 기괴한 소리를 토해냈다. 이런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는다는 건, 매일매일이 서바이벌 게임의 최종 라운드 같았다.

“젠장, 오늘은 영 소득이 없네.”

지혜는 낡은 고글을 살짝 들어 이마 위로 올렸다. 거친 숨을 내쉬며 망가진 쇼핑 카트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녹슨 바퀴가 덜컹거리며 돌무더기를 겨우 넘어섰다. 카트 안에는 먼지 앉은 빈 통조림 캔 몇 개와, 어딘가에서 주운 녹슨 철근 조각이 전부였다. 이런 걸로 뭘 할 수 있을까. 그냥 오늘의 허탈함을 보여주는 증표나 다름없었다.

“하다못해, 멀쩡한 양말 한 짝이라도 나오지.”

웅얼거리며 거대한 돔형 건물의 잔해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는 번화했던 상점가였을 테지만, 지금은 폐기물과 잔해들이 뒤섞인 거대한 쓰레기장이었다. 조심스럽게 무너진 서가 사이를 헤치며 나아갔다.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는 순간, 그녀의 신경은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 세계에서 작은 소리 하나도 무시할 수 없는 경고였다.

지혜는 허리에 찬 녹슨 칼집에서 손잡이가 닳은 식칼을 빼들었다. 무게감이 주는 안정감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언제든 자신을 지켜야 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스캔하며 숨을 죽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쥐새끼 한 마리 지나간 흔적조차 없었다.

‘너무 예민한가.’

한숨을 쉬며 칼을 다시 칼집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악!”

머리 위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에 지혜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이어서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먼지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녀가 방금 전 지나온 서가 더미 중 하나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젠장! 뭐야? 지진이야?”

지혜는 잔뜩 경계하며 무너진 서가를 노려봤다.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그 안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찢어진 옷을 입은 남자의 형체가 드러났다.

“으음… 맙소사. 괜찮으세요?”

남자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팔꿈치를 짚고 겨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흙먼지로 뒤덮인 얼굴은 물론, 머리칼까지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의 옷은 찢어지고 더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멀쩡해 보였다. 지혜가 입고 있는, 여기저기 덧대고 기워 누더기가 된 옷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체 어디서 굴러온 돌이야?’

지혜는 칼을 다시 뽑아들며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했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낯선 사람과의 조우는 대부분 불행한 결말을 낳았다.

“거기 당신. 누구야?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잔뜩 흙먼지가 묻은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더니, 헤실거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은 폐허의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해맑은 미소였다.

“아, 안녕하세요! 음… 저도 제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길을 헤매다가…”

“길을 헤매? 지금 이딴 세상에서 ‘길을 헤맨다’는 말을 해?”

지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 남자의 정신 상태가 온전한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저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런 위험한 곳을 활보하다니.

“네, 뭐… 여기가 생각보다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하하. 죄송해요, 제가 뭘 좀 찾다가 발을 헛디뎌서 그만…”

남자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의 눈길은 무너진 서가를 따라 이동했고, 이내 지혜의 낡은 쇼핑 카트 안을 향했다. 그는 카트 안에 담긴 녹슨 철근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혹시 이걸 찾으시는 건가요? 제가 혹시 방해라도…?”

방해는 무슨 방해. 이 남자가 서가를 무너뜨리지만 않았으면 지혜는 벌써 이곳을 떠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저 철근은 그녀가 애써 찾아낸, 그나마 쓸모 있는 고철 조각이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찾는 게 다 날아갔어! 그리고 내가 뭘 찾든 당신 알 바 아니잖아?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이야!”

지혜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뚝뚝 묻어났다. 그녀는 다시 칼을 고쳐 쥐고 남자에게 겨눴다.

“어, 어어, 진정하세요! 저는 도윤이라고 합니다! 정말 악의는 없었어요! 그… 혹시… 제가 보상이라도 해드릴까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세요?”

도윤이라는 남자는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 와중에도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낡은 배낭을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했다.

‘필요한 거? 이 세상에 필요한 게 한두 가지인가? 아니, 저 인간에게 그걸 요구한다고 나올 리가 없잖아.’

지혜는 의심의 눈초리로 도윤의 손을 지켜봤다. 배낭 속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이거… 어떠세요? 제가 좀 아껴둔 건데…”

도윤이 내민 것은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하게 보존된 통조림 캔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통조림이 아니었다. 라벨에는 선명하게, ‘프리미엄 갈치조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갈치조림! 이 세상에서 갈치조림 통조림은 금값 중의 금값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걸 본 게 대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 이걸… 네가 갖고 있다고?”

지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경계심은 여전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완전히 통조림 캔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 제가 특별히 아끼던 거예요! 혹시 이거면 제 실수를 용서해주실 수 있을까요?”

도윤은 해맑게 웃으며 통조림 캔을 내밀었다. 지혜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귀한 걸 아무렇지 않게 내밀다니. 미쳤거나,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당신… 혹시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이거… 굉장히 비싼 거야. 귀한 거라고.”

“알죠! 저도 정말 어렵게 구한 거예요. 하지만 제 실수로 누군가의 중요한 사냥감을 놓치게 한 것 같아서… 이걸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사냥감? 철근이 사냥감은 아니잖아….’

지혜는 도윤의 엉뚱한 말에 다시 한번 어이가 없었지만, 갈치조림 통조림의 유혹은 너무나 강력했다. 그녀는 결국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좋아. 그럼 이건 내 거야.”

지혜는 통조림 캔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걸 열면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상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감사합니다!”

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헤실거렸다. 지혜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어. 이제 할 일 다 끝났으니까 가 봐. 나도 바빠.”

“네? 아… 네. 그런데 저기…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잘 몰라서요.”

도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에는 망연자실한 기색이 역력했다.

“뭘 몰라? 온 세상이 폐허인데, 그냥 아무 데나 가.”

“아니, 그게… 저는 사실 이 근처에 있는 생존자 캠프를 찾고 있었거든요. 혹시… 이쪽 방향으로 가는 길을 아시나요?”

도윤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지혜가 막 탐색을 시작하려던, 가장 위험하고 불안정한 구역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생존자 캠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혜의 지식으로는.

“캠프? 여기에는 그런 거 없어. 그리고 그쪽은…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왜요? 혹시 위험한가요?”

도윤의 순진한 질문에 지혜는 한숨을 쉬었다. 이 세상에서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곳은 다른 차원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었다.

“궁금하면 직접 가 보던가. 난 경고했어.”

지혜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쇼핑 카트를 끌고 발길을 돌렸다.

“저, 저기요! 잠시만요! 혹시 저… 하룻밤만 좀… 신세를 질 수 없을까요?”

뒤에서 들려온 도윤의 목소리에 지혜는 멈칫했다.

“뭐? 미쳤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제가 가진 게 좀 더 있는데… 내일 아침에 필요하시면 다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

지혜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남자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고? 그것도 자신의 은신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윤의 눈빛은 너무나 간절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배낭은 왠지 모르게 여전히 묵직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오늘 너무나 허탕을 쳤다. 갈치조림 통조림 하나로는 다음 며칠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지혜는 짧게 고민했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는 건… 매일이 도박이니까.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그리고… 날 속이려 들면, 그땐 네가 가진 모든 것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질 줄 알아.”

지혜는 차갑게 경고했다. 도윤은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띠며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네! 당연하죠!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있을게요!”

그의 과도한 긍정에 지혜는 다시 한번 어이가 없었다. 과연 저런 순진한 얼굴을 한 남자가 이 척박한 세상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가 가진 ‘더 많은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통조림이 전부일 수도 있겠지만.

지혜는 한숨을 쉬며 쇼핑 카트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도윤은 그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어둠이 폐허의 도시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낯선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일 아침까지,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갈치조림 통조림의 달콤한 환상이 머릿속을 맴도는 와중에도, 지혜의 신경은 여전히 곤두서 있었다. 이곳은 잠깐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잔혹한 세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