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절대강호: 멸망록**
**1장. 지옥에서 온 무림대회**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이따금 피 섞인 비가 내렸다. 빗방울은 마른 대지에 닿기도 전에 바닥에 뒹구는 잿더미와 섞여 진득한 흙탕물이 되어갔다. 한때 문명의 상징이었던 고층 빌딩들은 뼈대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마저도 여기저기 흉터처럼 찢겨 있거나, 아예 주저앉아 거대한 무덤처럼 보였다. 세상은 죽음의 그림자에 잠식당했다.
“젠장, 썩어 문드러질 놈들.”
한세진의 낮은 욕설이 폐허 사이를 울렸다. 그는 빗물과 먼지로 뒤덮인 얼굴을 한쪽 소매로 거칠게 닦아내며 낡은 단봉(短棒)을 고쳐 잡았다. 주위에는 그의 키만 한 역귀 세 마리가 고깃덩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녀석들의 몸뚱아리는 검붉은 피와 진물이 뒤섞여 역겨운 악취를 풍겼다. 역귀들은 예전의 인간이었던 시절의 흔적을 간신히 유지한 채,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고 뒤틀려 있었다.
세진은 지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경계했다. 녀석들은 떼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었다. 분명 이 주변에 더 있을 터였다. 그는 빠르게 시선을 움직이며 빗줄기 너머의 그림자들을 살폈다. 이 끔찍한 세상이 시작된 지 햇수로 5년. 사람들은 역병처럼 번지는 존재들을 ‘역귀’라 불렀다. 놈들은 한때 우리의 이웃이었고,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지금은 오직 살을 찢고 피를 탐하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일 뿐.
멀리서 어둠 속을 헤매는 또 다른 역귀들의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세진은 망설일 틈도 없이 발길을 재촉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놈들에게 잡히면 끝이었다. 이미 수많은 동료와 이름 없는 무림인들이 역귀의 이빨과 발톱에 스러졌다.
목적지는 한강 너머, 그나마 ‘안전지대’라는 허울뿐인 이름이 붙은 옛 용산이었다. 그곳에선 무림맹이 주최하는 마지막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최후의 강자들을 가려낼 무림대회. 천하의 운명을 걸었다는 거창한 명분 아래 모인, 발버둥 치는 인간들의 마지막 몸부림.
세진은 낡은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덜컹거리는 엔진 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이 바이크는 그가 세상이 망하기 전부터 애지중지하던 유일한 보물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지르며, 세진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잿빛 구름이 걷힌 틈으로 붉은 노을이 비쳤다. 어둠에 잠식된 도시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은 어딘가 서글프면서도, 묘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도 해는 뜨고 지는구나.
“젠장, 희망이라니. 웃기는 소리.”
세진은 비웃듯 중얼거렸다. 희망 따윈 개나 줘버린 지 오래였다. 그에게 남은 건 오직 분노와 복수심뿐. 그리고 그 모든 걸 쏟아부을 마지막 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
**용산, 옛 무림맹 본거지.**
폐허가 된 도시 한복판에 홀로 우뚝 솟은 옛 용산 무림맹 본거지는 기묘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건물이 역귀들의 공격에 무너져 내렸지만, 이곳만은 용케 버텨냈다. 마치 성벽이라도 둘러친 듯, 높고 견고한 담장이 부서진 채로도 위용을 자랑했다. 그 안에서는 드물게 불빛이 새어 나왔고, 인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세진은 바이크를 버려두고 담장의 부서진 틈을 통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였다. 이곳은 각지에서 모여든 무림인들로 가득했다. 정파의 명문 대가, 사파의 잔혹한 고수들, 심지어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던 기인들까지.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건 역귀 사태 이후 처음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절망이 역력했지만, 동시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꽃 같은 투지가 서려 있었다.
“어이, 한세진! 아직 살아있었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진은 고개를 돌렸다. 찢어진 검은 도포를 걸친 건장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금강문의 ‘철주먹’ 유강이었다. 그는 무림이 풍전등화 같았던 시절에도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었다. 지금은 그의 너털웃음도 어딘가 비장하게 들렸다.
“오랜만이군, 유강. 자네도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꽤나 독한 목숨인 모양이야.”
세진은 가볍게 받아쳤다. 유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픽 웃었다.
“이 몸이 이대로 죽으면 이 천하가 너무 아쉽지 않겠나. 자네도 마찬가지고. 그나저나 소문은 들었나? 이번 대회,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
“심상치 않다니?”
“무림맹주가 직접 나섰다네. 이번 대회는 단순한 강자 가리기가 아니라고. 천하의 운명을 건 중대사가 달렸다고 말이야.”
유강의 말에 세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맹주는 언제나 신비에 싸인 인물이었다. 그가 직접 나설 정도라면, 정말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맹주가 뭘 어쩌겠다는 건데?”
세진의 질문에 유강은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소문으로는… 역귀의 근원을 찾아 박멸할 방법을 찾았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방법을 실행할 단 한 명의 강자를 뽑는다는군.”
세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귀의 근원? 그 지긋지긋한 존재들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무림대회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자, 최후의 결전이었다.
이때, 웅성거리던 무림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무림맹 본거지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연무장. 그곳에 설치된 임시 단상 위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흰 수염, 깊게 패인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무림맹주, ‘천검(天劍)’ 이시백이었다.
맹주의 등장에 장내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든 무림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세진 또한 숨을 멈추고 맹주를 응시했다.
“제군들.”
이시백 맹주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연무장 전체를 울리는 듯한 힘이 있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이 혼돈의 세상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강호의 빛이다. 여러분의 어깨에는 이 천하의 운명이 걸려 있다. 나는 오늘, 인류의 존망을 결정할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맹주의 말에 무림인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날이 오는 건가.
“우리는 역귀의 근원을 찾아냈다.”
그의 선언에 장내는 술렁였다. 거짓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동시에 사실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 무림인들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그 근원은 이 땅, 이 서울의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봉인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역귀들이 세상에 창궐한 것도 그 봉인이 약해진 탓이다. 우리가 그 근원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면, 이 세상은 영원히 지옥이 될 것이다.”
이시백 맹주는 잠시 말을 끊고 무림인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여기까지 버텨낸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했다.
“허나, 그곳은 살아있는 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죽음의 땅이다. 엄청난 수의 역귀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으며, 봉인의 힘은 우리를 끊임없이 옥죌 것이다. 하여, 우리는 단 한 명의 강자를 선발하여 그 임무를 맡길 것이다.”
맹주의 다음 말은 천둥처럼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승자만이 그곳에 갈 자격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이 천하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멸망록’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세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무림맹주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모든 무림인들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지옥 같은 세상, 그 절망 속에서 피어난 마지막 한 줄기 희망. 하지만 그 희망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잔혹한 기회였다.
그날 밤, 옛 용산 무림맹 본거지는 잠들지 못했다. 역귀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이제 무림인들의 심장을 조이는 불안감보다, 새로운 결의와 투지로 가득 찬 웅성거림에 묻혔다.
세진은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한때는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려 들었던 정파와 사파의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각자의 야망과 복수심,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간절함이 뒤섞여 빛나고 있었다.
유강이 옆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도 참가할 거지? 한세진.”
세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에게는 이 대회에 참가해야 할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역귀들에게 스러져 간 가족과 동료들의 원혼.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끝내고자 하는 의지.
“당연하지.”
그의 눈빛은 비장했다. 단봉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 누구든 끝내야 하지 않겠나.”
세진의 말에 유강은 작게 헛웃음을 쳤다.
“좋아. 그럼 승자는 나겠지만, 자네가 나름대로 선전하기를 빌어주겠네.”
서로를 향한 가벼운 도발. 하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 통하는 비장함이 있었다. 무림대회는 내일부터 시작될 터였다. 최후의 강자를 가려낼, 인류 최후의 무림대회. 그 잔혹한 서막이 드디어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