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게임 (VRMMO)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고요한 밤이었다. 적어도 이진우의 머리 위, 낡은 층수 숫자 폰트가 박힌 복도 너머의 세상은 그러했다. 하지만 그의 귓속엔 광활한 초원의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마수의 포효, 그리고 손에 쥔 고대의 검이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파열음이 가득했다. ‘넥서스 월드’. 지금껏 나온 어떤 게임보다도 현실 같고, 또 현실보다 자유로운, 그의 유일한 낙원이자 생존 공간이었다.

“크아아악!”

VR 헤드셋 안, 거대한 트롤이 둔탁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진우는 허리를 숙여 간신히 피하며, 검날에 마나를 응축시켰다. 푸른 빛이 칼날을 따라 번뜩였다.

“이제 끝이다, 이 고철덩어리야!”

외치며 힘껏 검을 휘둘렀다. 쩌저적! 트롤의 단단한 피부가 갈라지며 경쾌한 사운드 이펙트와 함께 붉은 숫자들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이내 거대한 몸체가 무너지며 콰앙, 하는 진동이 진우의 전신을 울렸다. 승리.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휴우…”

무의식적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가상현실 속에서도 전투는 언제나 전신을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헤드셋을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묘한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은 가상현실 속에서 드넓게 펼쳐진 대초원을 따라 흘렀다. 저 멀리, 빛나는 도시 ‘아크로폴리스’의 첨탑들이 보였다. 그곳은 온갖 종류의 모험과 기회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반면, 현실의 그의 아파트는…

“젠장, 또야?”

진우는 헤드셋 너머로 낡은 방 안을 힐끗 보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에너지 음료 캔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내용물이 반쯤 남아있어 바닥에 축축한 얼룩을 만들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가 발로 찼나? 아니면… 고양이가 있었나?’ 하지만 진우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다. 게다가 발로 찰 리도 없었다. VR 플레이 중에는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허공에 손짓하는 게 전부였다.

“피곤한가 보네, 진우야.”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밤샘 플레이가 흔한 일상이었다. 그저 피로가 만들어낸 환각, 혹은 잠결의 실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헤드셋을 고쳐 쓰고 미니맵을 열었다. 길드원들과 함께 사냥해야 할 다음 목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몇 시간 후, 게임 내 시간으로는 이미 해가 져 어둠이 깔린 숲을 헤치고 있었다. 길드원 중 한 명인 ‘스텔라’가 대화창에 메시지를 띄웠다.

[스텔라: 진우 오빠, 오늘따라 뭔가 집중 못 하는 거 같아요? 방금 뒤따라오다가 몬스터한테 맞을 뻔했잖아요.]
[진우: 아, 미안. 좀 피곤해서.]
[스텔라: 혹시 어제 야근했어요? 요즘 얼굴이 많이 상해 보여요.]
[진우: 아냐, 그냥… 며칠 밤샘 플레이가 좀 무리였나 봐.]

그는 거짓말을 했다. 어젯밤 일어났던 일 때문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분명 닫아두었던 부엌 창문이 새벽에 스르륵 열려 있었다. 겨울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온몸을 얼렸다. 단순히 닫는 걸 깜빡했으리라 애써 생각했지만, 어딘가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욕실 거울에 김이 서린 채로 누군가 손가락으로 그린 듯한 알 수 없는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순간 섬뜩했지만, 곧 아침 안개 때문에 착각한 거라고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윽… 이러다 진짜 현실이 피폐해지겠네.”

현실의 아파트였다. VR 헤드셋을 잠시 벗었다. 목덜미가 뻐근했다. 스트레칭을 하려 몸을 일으키는 순간,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유리컵 하나가 스르륵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밀어낸 것처럼, 테이블 가장자리로 천천히 미끄러져 떨어지려 했다.

“뭐야?”

진우는 눈을 비볐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컵은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놀라서 손을 뻗는 순간, 컵은 테이블 끄트머리에서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부딪히며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진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이, 온몸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 이건 아니야.”

그는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누군가 장난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혹시… CCTV라도 달렸나? 아니, 이 낡은 아파트에? 그리고 누가 이런 장난을 친단 말인가? 도어락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겁에 질린 진우는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애써 무시하며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헤드셋을 다시 쓸 엄두도 나지 않았다. 대신,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먼지 쌓인 야구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무게감이 주는 미미한 안정감에 의지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도 단단히 닫혀 있었고, 옷장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구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공포가 온몸을 조여 왔다. 침묵. 깊은 침묵만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진우는 확신했다. 뭔가 ‘있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스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돌렸다. 옷장 문이 열려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천천히, 안쪽으로 스르륵 열려 있었다. 그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뭔가 희미하게 빛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가상현실 속에서 미지의 던전을 탐험할 때 느껴지는 서늘한 기시감이었다.

“뭐… 뭐야…”

진우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야구방망이를 든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는 한 발짝,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옷장 안의 어둠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에서 뭔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옷장 문이 활짝 열리며 안쪽에 걸려있던 그의 낡은 코트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어서 안에 쌓여 있던 오래된 박스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요란한 소음이 진우의 고막을 때렸다.

진우는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거실의 깨진 유리 조각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도망쳐야 해!’

현관문을 향해 달려가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는 차갑고 끈적거리는 감촉이었다. 놀라서 손을 떼려 했지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손잡이에 접착제라도 발라져 있는 것처럼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다.

“이게… 뭐야!”

그는 힘껏 손을 비틀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마…”

낮고 쉰 목소리였다. 진우는 얼어붙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감히 뒤를 돌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가지 마… 아직은…”

목소리는 더욱 가깝게 들려왔다. 마치 바로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차가운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소름이 쫙 돋았다.

그 순간, 진우의 눈앞에 펼쳐진 거실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벽지가 너울거리고, 천장의 조명이 깜빡였다. 마치 VR 게임 속에서 랙이 걸린 것처럼, 공간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그의 발아래 마룻바닥이 흐물흐물 물결쳤다.

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아는 현실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본 것은…

거실 한가운데, 깨져 흩어진 유리 조각들 위로, 그의 VR 헤드셋이 마치 제단을 장식하는 의식용 물건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는 광경이었다. 헤드셋의 검은 화면은, 마치 깊은 심연처럼 그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이 어둠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헤드셋 너머, 어둠이 가득한 그의 방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형태만 어렴풋이 보이는 존재였다. 그것이 다가올수록, 아파트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기괴한 소음이 진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어서… 들어와…”

이번에는 목소리가 두 개, 세 개, 혹은 그 이상으로 겹쳐 들려왔다. 마치 수십 명의 영혼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섬뜩함이었다.

진우는 공포에 질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VR 헤드셋은 마치 그를 유혹하는 지옥문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그는 도망칠 수 없는 무언가와 마주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마주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의 눈앞, 헤드셋 바로 위 공중에서, 아파트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나는 먼지 입자들이, 마치 작은 유령들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먼지 입자들이 모여, 스르륵, 아주 천천히,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손가락이었다. 가늘고 창백한 손가락이, 허공에 대고 아주 천천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김 서린 욕실 거울에 새겨져 있던, 바로 그 알 수 없는 문양을.

진우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의 삶, 그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VR 게임이, 이제 현실의 공포와 뒤섞여 알 수 없는 악몽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문양이 허공에서 완성되는 순간, 아파트 전체가 다시 한번 거세게 흔들렸다. 천장의 조명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암흑 속에서, 헤드셋의 검은 화면이 기이하게 번쩍였다.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의 현실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