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화: 잿빛 도서관
차가운 바람이 낡은 방독면의 정화 필터를 스쳐 지나갔다. 퀴퀴한 먼지와 썩은 철 냄새가 필터를 뚫고 희미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카인은 닳아빠진 장갑을 낀 손으로 녹슨 망가진 표지판을 짚었다. ‘구시가지 제7구역 진입 금지’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진입 금지. 이 망가진 세상에선 그 어떤 경고도 무의미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금지된 곳으로 향해야만 했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잿빛이었다. 해는 오래전에 그 존재감을 잃었고, 희미한 빛만이 늘어진 건물 잔해 사이로 간신히 스며들었다. 이곳은 한때 ‘지식의 전당’이라 불렸던 구립 도서관의 폐허였다. 오래된 기록에는 이곳 지하에 정화 필터를 거치지 않아도 마실 수 있는 비상 식수가 저장되어 있었다고 했다. 물론, ‘옛 세상’의 기록이 지금 이 지옥에서도 유효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카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며칠째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카인은 허리춤에 찬 낡은 손도끼의 날을 만졌다. 전투용으로 개조된 공구였다. 주변은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건물 잔해가 불규칙하게 쌓여 거대한 미로를 이루고 있었고, 썩어 문드러진 책장과 반쯤 불타다 남은 종이 조각들이 발밑에서 부스럭거렸다. 발소리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굶주린 짐승도, 숨어 있는 약탈자도 아니었다. 바로 ‘침묵’이었다. 침묵은 언제나 재앙의 전조였다.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카인의 손에 들린 낡은 랜턴이 희미한 원형 빛을 뿌렸다. 빛이 닿는 곳마다 곰팡이와 이끼가 뒤덮인 책들이 망자의 비문처럼 꽂혀 있었다. 책 한 권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 표지에 ‘희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세상에 희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크르륵….”
낮고 긁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카인은 동작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랜턴 불빛을 천천히 돌렸다. 어둠 저편, 책장 사이의 틈에서 푸른빛 두 개가 깜빡였다.
‘시든 자’.
썩은 살점과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끔찍한 형상이었다.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었다. 이 폐허의 저주받은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 그들은 죽지 않고,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생존자의 온기만을 갈망하며 움직였다.
카인은 손도끼를 단단히 쥐었다. 무모한 싸움은 피해야 했다. 식량도, 탄약도 부족했다. 그러나 시든 자는 이미 카인의 존재를 감지했다. “크르르륵!” 놈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책장 사이에서 몸을 비틀며 기어 나왔다. 뒤이어 다른 푸른빛들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세 마리.
“젠장.”
카인은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도망칠 곳을 찾았다. 시든 자들은 느렸지만, 집요했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며 카인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 좁고 복잡한 공간에서는 발각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첫 번째 시든 자가 썩어 문드러진 손톱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카인은 몸을 낮춰 공격을 피하고, 손도끼를 휘둘러 놈의 어깨를 강하게 찍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썩은 살점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시든 자는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듯, 잠시 휘청거릴 뿐 다시 카인에게 덤벼들었다.
뒤에서 또 다른 시든 자가 다가왔다. 카인은 재빨리 몸을 돌려 발로 놈의 무릎을 걷어찼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무릎 관절이 부러졌지만, 놈은 질질 다리를 끌며 기어코 카인에게 손을 뻗었다. 놈들의 손이 닿으면 살점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카인은 비좁은 책장 사이를 헤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랜턴 빛이 흔들리며 주변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뒤에서 시든 자들의 긁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카인은 필사적으로 한때 ‘자료실’이라 불리던 곳을 향해 내달렸다. 기록에 따르면, 그곳에 지하 통로로 이어지는 비밀 입구가 있었다.
철골 구조물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곳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낡은 복도를 지나자, 거대한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분명히 ‘지하 자료실’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찾았다…!”
카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시든 자들이 바로 뒤까지 따라붙은 것이다. 세 번째 시든 자의 썩은 손이 카인의 어깨에 닿으려 했다.
‘쉬이익!’
카인은 몸을 날려 겨우 피했고, 동시에 손도끼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강타했다. ‘퍽!’ 소리와 함께 썩은 두개골이 부서지며 놈은 힘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다른 두 마리는 여전히 끈질기게 다가오고 있었다.
카인은 망설일 틈도 없이 철문을 잡고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삐걱거리는 굉음과 함께 육중한 철문이 겨우 열렸다. 안에서는 눅눅한 흙먼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크르륵…!”
철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카인은 몸을 구겨 넣으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쾅! 등 뒤에서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시든 자들의 섬뜩한 울음소리가 멀어졌다. 카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어둠. 완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 그를 감쌌다. 랜턴 불빛마저 삼켜버릴 듯한 깊은 어둠이었다. 이곳은 지하 통로가 아니라, 마치 세상의 끝으로 통하는 길 같았다. 땀으로 젖은 손으로 랜턴을 더듬었다.
그때, 저 깊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물이 흐르는 소리였다. 희망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흐르는 물소리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소리가 있었다.
‘철컥… 철컥…’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혹은 뼈가 긁히는 듯한 소리. 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의 소리였다. 카인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요동쳤다.
“젠장, 설마 여기에….”
카인은 중얼거렸다. 손에 든 랜턴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둠은 그를 집어삼킬 듯이 깊어지고 있었다. 희망의 물줄기는 또 다른 지옥으로 흐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