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어둡고, 콘크리트 벽은 차가웠다. 외부의 세상은 감염자들의 끔찍한 울부짖음으로 가득했지만, 이곳 지하 벙커 안은 또 다른 종류의 비명으로 얼어붙었다. 끔찍한 침묵 속에서, 강철로 된 식량 저장고의 문이 억지로 비틀려 열렸다.
“젠장, 김영감! 문 좀 열어봐요!”
유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어깨는 핏발 선 채로 문을 들이받은 흔적이 역력했다. 며칠째 식량 배급을 중단하고 문을 걸어 잠근 김영감은 벙커의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참다못한 유진이 다른 생존자 몇 명과 함께 문을 부수기로 결정한 참이었다.
“크으읍…!”
마지막 일격과 함께, 억압적으로 닫혀 있던 강철 문이 굉음을 내며 비틀렸다. 거대한 자물쇠가 부서지고, 문이 안쪽으로 젖혀지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어둠 속에서 차가운 피비린내가 확 풍겨 나왔다.
“이게… 무슨…”
유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손전등 빛이 비춘 곳에는 김영감이 널브러져 있었다. 식량 자루들 사이에 기이한 자세로 쓰러진 그의 가슴에는 시뻘건 칼자국이 선명했다. 이미 생명은 완전히 끊어진 지 오래였다. 바닥에는 흥건한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살인… 살인이야!”
“세상에, 김영감이 죽었어!”
뒤에 있던 생존자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벙커는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좀비의 위협이 아닌, 내부의 공포가 그들을 덮쳤다. 닫힌 철문 안에서 사람이 죽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던 벙커에서, 밀실 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은 김영감의 시체와, 처참하게 부서진 자물쇠를 오갔다. 안에서 걸린 빗장을 부수고 들어왔는데, 시체는 안에 있었다. 칼은… 칼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침착해! 일단 여길 봉쇄하고,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마!”
그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겨우 질서를 잡으려는 듯했다. 그때,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낡은 작업복을 걸치고, 기름때 묻은 안경을 코에 걸친 이현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벙커 구석에서 고장 난 라디오를 만지작거리거나 알 수 없는 책을 읽는 기인으로 통했다. 모두가 절망에 허덕일 때도 홀로 무심한 얼굴을 하곤 했다.
“이현 씨, 여긴 위험합니다. 돌아가세요.” 유진이 말했다.
이현은 대답 없이 김영감이 쓰러진 저장고 안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피, 천장의 전등, 그리고 문틀을 스치듯 훑었다. 유진은 이현의 차분한 태도에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갔다.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다면서요?” 이현이 나지막이 물었다. 목소리는 늘 그랬듯 감정 없이 건조했다.
“네. 김영감이 하도 문을 안 열길래, 안에서 걸어 잠근 줄 알았습니다. 저 튼튼한 빗장을 보세요. 안에서 걸지 않으면 절대로 그렇게 닫힐 수 없습니다.”
유진은 바닥에 나뒹구는 큼지막한 강철 빗장 조각을 가리켰다. 손잡이를 잡아 돌려 안으로 완전히 잠가야 하는 식의 구식 빗장이었다.
“그럼 어떻게 살인자가 밖으로 나갔다는 거죠?” 이현은 묻는 게 아니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문제입니다. 창문도 없고, 환기구는 사람 한 명 못 들어갈 정도로 작고… 게다가 칼도 사라졌습니다. 시체도, 문도, 모든 게 미스터리입니다.” 유진은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벙커의 미래는 안 그래도 불안한데, 내부의 살인은 치명적이었다.
이현은 저장고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끈적한 피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바닥의 피 웅덩이로 향했다. 김영감의 시체는 문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김영감의 옷에 핏자국이 어디에 가장 많습니까?” 이현이 물었다.
유진은 고개를 숙여 시체를 다시 살폈다. “가슴 쪽입니다. 깊게 찔린 것 같더군요. 바닥에도 저렇게 피가 흥건합니다.”
“문틀에는요?”
“문틀이요? 아뇨, 특별한 건….” 유진은 문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강철 문틀은 지저분했지만, 특별히 핏자국이 튄 흔적은 없었다.
“이리 와보세요.” 이현이 손전등을 들어 문턱 바로 바깥쪽 바닥을 비췄다. 콘크리트 바닥의 작은 틈새에, 말라붙은 듯 보이는 검붉은 얼룩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여기, 아주 미미하지만 피가 튀었습니다. 문 바깥쪽 바닥입니다.”
유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무슨 의미죠?”
“김영감이 문 안에서 칼에 찔렸다면, 피는 문 안쪽에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피는 문턱 바깥쪽, 정확히는 빗장이 걸리는 부분 근처에 튀었습니다. 아주 작은 양이지만, 분명히.” 이현의 목소리에 미묘한 확신이 실렸다.
“하지만 김영감은 안에서 죽었잖아요.” 유진이 반문했다.
이현은 무릎을 꿇고 부서진 빗장 조각을 만져보았다. “빗장은 안에서 걸게 되어 있습니다. 돌려서 홈에 끼우는 방식이죠. 꽤 튼튼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걸 부수는 데도 꽤 힘을 썼을 텐데요.”
그는 부서진 빗장을 뚫어져라 보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살인자는 밖에 있었고, 김영감은 문을 잠그지 않은 채 혼자 저장고에 들어갔습니다. 혹은 살인자가 김영감을 안으로 밀어 넣었겠죠.” 이현이 차분히 설명했다.
유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 살인자가 김영감을 찔렀을 때, 문은 열려있었다는 겁니까? 그리고 살인자는 칼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런데 누가 문을 안에서 잠갔다는 거죠?”
“아뇨, 김영감은 빗장을 잠글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이현은 김영감의 시체를 힐끗 보았다. “강철 빗장은 밖에서 잠겼습니다. 살인자가 말이죠.”
유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밖에서요? 빗장은 안에서만 잠글 수 있습니다. 그걸 제가 부셨는데!”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 빗장은 밖에서 ‘걸린’ 게 아닙니다. 밖에서 ‘조작’된 겁니다.”
그는 저장고 문과 문틀 사이의 좁은 틈새를 가리켰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얇은 철사를 꺼냈다. 벙커의 낡은 전선에서 뽑아낸 듯한 가느다란 철사였다.
“이런 겁니다.” 이현은 철사를 빗장이 걸려 있던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이 빗장의 손잡이 부분은 돌려서 잠기는 구조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얇은 철사를 이용해서 손잡이를 조작한다면, 밖에서도 빗장을 돌려 잠글 수 있습니다. 김영감을 찌른 살인자가 말이죠.”
유진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미세한 조작을… 게다가 칼은요? 칼은 어디로 갔다는 말입니까?”
이현은 김영감의 시체에 다가갔다. 그의 눈은 김영감의 몸을 스쳐 지나, 시체 뒤편의 벽면으로 향했다. 벽에는 낡은 환풍구가 있었다. 성인 남자가 들어가기엔 너무 작지만, 주먹 정도는 들어갈 크기였다.
“칼은… 저 환풍구로 나갔을 겁니다.” 이현이 말했다.
유진은 경악했다. “칼이요? 저 작은 환풍구로? 아무리 그래도 칼이 통과할 리가…”
이현은 환풍구 아래 바닥에 굳어붙은 또 다른 검붉은 얼룩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칼날에 묻은 피가 떨어져 굳었습니다. 환풍구를 통해 칼이 빠져나가면서 묻은 흔적이죠. 칼날을 손잡이에서 분리했거나, 아니면 칼날이 아주 얇고 길어서 통과시켰겠죠. 벙커에서 발견되는 녹슨 칼이나 고철 조각들을 활용해서 직접 만든 무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살인자는 이 모든 것을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어쩐지 두려움 같은 감정이 스쳤다.
“살인자는 김영감과 다투다가, 아니면 미리 숨어있다가 김영감을 찔렀습니다. 빗장을 잠그지 않은 채 문을 닫고, 미리 준비한 철사로 빗장을 조작해 잠근 겁니다. 그리고 피 묻은 칼은 환풍구를 통해 밖으로 빼냈겠죠. 모든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요.”
이현은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듯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김영감을 죽인 살인자는… 지금 이 벙커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건… 김영감이 숨겨둔 식량이었겠죠. 이 절박한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동기입니다.”
그의 시선이 바닥의 피 웅덩이에서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어두운 복도로 향했다. 모두의 얼굴에 공포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닫힌 철문은 열렸지만, 보이지 않는 칼을 든 살인자는 여전히 그들 사이에 숨어있었다. 밤은 더욱 깊어졌고, 벙커의 평화는 영원히 깨진 듯했다. 이제 그들은 좀비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이 드리운 어둠과도 싸워야 했다.
이현은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임무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