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강물처럼 흑랑진을 휘감고 있었다. 제국군이 밤새도록 지키는 요새, 그 높다란 성벽 위로 횃불의 잔영이 흔들릴 때마다 차가운 강풍이 날카로운 비명처럼 귓가를 스쳤다. 진은 흙먼지로 뒤덮인 망토를 움켜쥐고 바싹 마른 입술을 씹었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처럼 엎드린 열 명의 들불 단원들도 심장이 터질 듯한 침묵 속에 각자의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단순히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흑랑진은 이 일대의 모든 영맥을 통제하는 핵심 거점이며, 무엇보다 거대한 영력 결계로 둘러싸여 있었다. 본대가 아무리 맹렬히 공격해도 그 결계가 무너지지 않는 한 시간만 낭비할 뿐이었다. 진과 그의 소대가 할 일은, 단 하나의 목표.
“결계의 핵. 저 안쪽에 있다.”
묵노인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진의 귓가에 울렸다. 며칠 전, 찢어진 지도 위에서 묵노인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곳. 제국의 심장이자, 이곳 들불 단원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심장.
진은 고개를 들어 흑랑진의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밤은 깊었으나, 요새 안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고, 이따금씩 병사들의 쇳소리 섞인 대화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제국은 잠들지 않는 거인이었다.
“시간은 자정이다.”
그의 곁에 선 ‘까마귀’ 지혁이 낮게 읊조렸다. 지혁은 들불 내에서도 손꼽히는 잠입의 명수였다. 그림자를 밟듯 움직이는 그의 발걸음은 심지어 같은 단원들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단원들은 주변 영맥의 흐름을 방해하며 시선을 끌어라. 우리는 핵으로 간다.”
그는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옥패를 꺼냈다. 그 옥패는 묵노인이 준 것이었다. 제국의 영력 결계는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변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제국군의 전력을 증폭시키는 저주받은 장치였다. 묵노인은 이 옥패가 결계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역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 번 쓰면 부서지는 일회용품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각자 위치로.” 진의 명령에 단원들은 미끄러지듯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바람이 거세졌다. 찢어진 비단처럼 펄럭이는 진의 망토 속에서, 그는 정신을 집중했다.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땅의 떨림, 바람의 속삭임, 먼지 속의 미세한 냄새. 들불 단원이 된 후, 그는 단순히 무술을 익힌 것을 넘어선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부님이 말했던 ‘천지인의 조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쿵. 쿵.
심장이 거칠게 울렸다. 들불 단원들의 삶과 죽음이, 그리고 이 지역 민초들의 내일이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
흑랑진의 외곽, 낡은 배수로의 입구는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진은 지혁의 신호에 따라 먼저 몸을 구겨 넣었다. 축축하고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밑에는 진득한 오물이 질퍽거렸고, 천장에서는 시커먼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제국은 자신들의 더러움을 이런 곳에 숨겨두지.” 지혁이 진의 뒤를 따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진은 대답 없이 손에 든 소형 야명주(야광 구슬)를 더욱 단단히 쥐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구슬이 배수로의 음침한 풍경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지혁의 눈은 흡사 밤의 맹수 같았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배수로의 끝은 거대한 암반으로 막혀 있었다. 그러나 지혁은 망설임 없이 암반의 틈새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고는 작은 틈을 찾아낸 듯, 손바닥으로 벽을 강하게 밀었다.
쉬이이익!
거친 모래 갈리는 소리와 함께 암반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제국군이 버려두었거나, 아니면 존재조차 잊어버린 비밀 통로였다. 어쩌면 이런 통로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제국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자신들의 방어가 너무나도 완벽하여, 이런 사소한 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오만함.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흙과 돌멩이가 섞인 답답한 공기가 코를 스쳤다. 이곳은 흑랑진의 지하 감옥과 이어지는 곳이었다.
“왼쪽으로 돌아라. 저기 감시병들의 순찰 경로가 꼬여 있어. 십오 초.” 지혁이 속삭였다.
진은 눈을 감고 기척에 집중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발소리, 멀어지는 병사들의 대화 소리. 정확히 십삼 초 후, 진은 지혁의 신호에 맞춰 움직였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두 사람은 감시병들의 틈새를 뚫고 나아갔다.
지하 감옥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음침한 복도 양옆으로 철창이 늘어서 있었고, 안에서는 미약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감옥의 가장 안쪽, 제국의 죄수들이 아닌 듯 보이는 이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의 기색은 영기가 봉인된 듯 희미했다. 아마도 제국에 반항하다 잡힌 다른 수련자들일 터였다.
그들의 고통이 진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흑랑진 전체의 운명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결계의 핵은 감옥의 가장 깊은 곳, 영맥의 중심부에 있을 거야.” 진이 속삭였다.
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분명 강력한 수호자가 지키고 있을 거다.”
예상대로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자, 이내 한기가 느껴지는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수정이 공중에 떠 있었고, 그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칙칙한 영력이 공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 영력은 단순히 결계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주변의 생기를 조금씩 빨아들이고 있었다.
진은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것이 바로 묵노인이 말했던 ‘흡정결계(吸精結界)’였다. 주변의 모든 생명을 서서히 고사시키는 저주받은 결계.
그리고 수정 앞에는, 갑옷을 입은 한 명의 무인이 좌정하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검은 비늘 갑옷으로 뒤덮고 있었고, 얼굴은 깊은 투구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는 검붉은 기운이 뱀처럼 스멀거렸다. 그는 마치 영혼 없는 인형처럼 미동도 없었으나, 진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을 느꼈다.
“제국 수호대장 ‘명암(冥暗)’.” 지혁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강휘 대장군의 직속 부하 중 하나다. 녀석은 ‘영혼 강탈자’라는 별명으로 불리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적의 영혼을 뽑아낸다고 알려져 있다.”
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명암. 제국 수호대장 중에서도 악명 높은 자였다. 그가 이곳을 지키고 있을 줄이야.
그때였다. 명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투구 그림자 속에서 핏빛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네놈들… 들불의 잔당들이군.”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고, 동시에 온 공간을 뒤흔드는 듯한 진동을 담고 있었다. 명암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은 거대한 산맥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명암의 손이 허공을 휘젓자, 검붉은 영력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복도 양쪽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변하더니, 진과 지혁을 향해 쇄도했다.
“젠장!” 지혁이 외치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단검은 그림자를 찢어발기듯 번개처럼 움직였다.
진은 명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자가 그림자를 조종하는 술법을 쓰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원한이 서려 있는 듯,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지혁! 그림자는 내가 맡는다! 자네는 명암의 움직임을 봉쇄해!” 진이 소리쳤다.
그림자들이 진의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진은 품속의 옥패를 꽉 쥐었다. 그리고는 심호흡과 함께 옥패에서 작은 틈을 찾아 그 틈새로 손가락 끝에서 나온 영력을 흘려보냈다.
“천지개벽(天地開闢)!”
진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푸른빛 영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영력은 단순한 기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던, 태고의 자연과 교감하는 특별한 힘이었다. 푸른 영력은 그림자들을 덮쳐, 마치 어둠을 삼키는 빛처럼 그들을 소멸시켰다. 찢겨져 사라지는 그림자들 속에서 희미한 영혼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명암의 안광이 더욱 붉게 빛났다. “건방진 꼬맹이… 감히 이 명암 앞에서 영력을 뽐내는가!”
명암의 검붉은 영력이 더욱 거칠게 휘몰아쳤다. 이번에는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형체가 없는 어둠이 뭉쳐지더니, 수십 개의 거대한 촉수로 변하여 진과 지혁을 향해 뻗어 왔다. 촉수 하나하나에서 섬뜩한 영혼 흡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지혁은 이미 명암의 옆구리를 노리고 접근해 있었다. 그의 단검은 마치 살아있는 은빛 뱀처럼 명암의 갑옷 틈새를 찾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챙! 단검이 갑옷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명암의 갑옷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하찮은 발버둥이로군.” 명암의 손이 허공을 잡더니, 지혁의 움직임을 묶어버렸다. 지혁은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혁마저 붙잡히다니. 명암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품속의 옥패를 꺼내 들었다. ‘천지개벽’으로 그림자들을 소멸시켰지만, 명암의 본체에는 거의 타격을 주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옥패는 결계의 핵을 부수는 데 써야 했지만, 지금은 지혁을 구하고 명암을 잠시라도 묶어두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제국 수호대장!”
진은 옥패에 모든 영력을 쏟아부었다. 옥패는 순식간에 눈부신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빛은 흑랑진의 결계 핵인 검은 수정과 명암, 그리고 진 자신을 향해 거대한 영력의 파동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영력의 파동이 폭발하며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검은 수정은 일시적으로 빛을 잃었고, 명암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몸을 감싸던 검붉은 영기가 잠시 흐트러졌다. 옥패는 모든 힘을 소진한 채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혁이 명암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명암의 영혼 흡수 기술에 당한 듯,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진… 괜찮나…?” 지혁이 겨우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진은 몸을 가다듬었다. 옥패의 힘은 강력했지만, 명암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핵을 부술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핵을 부숴야 한다…! 지혁, 내가 시간을 벌 테니 자네가…”
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랑진의 결계 핵인 검은 수정에서 섬뜩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진이 옥패로 가한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었다. 아니, 묵노인이 말했던 ‘역류’ 현상인가?
균열은 순식간에 수정 전체로 퍼져 나갔다.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 수정이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요새 전체를 감싸고 있던 흡정결계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밖에서 기다리던 들불 본대의 맹렬한 함성이 흑랑진 전체를 뒤흔들었다.
“돌격하라! 결계가 무너졌다!”
환호성과 함께 수천의 들불 단원들이 흑랑진으로 밀려 들어오는 소리가 지하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진은 가슴 벅찬 환희를 느꼈다. 임무 성공! 흑랑진이 이제 무너질 터였다.
하지만 그 환희는 한순간에 싸늘한 공포로 변했다.
검은 수정이 부서진 자리에서, 엄청난 밀도의 영력이 폭주하듯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영력은 이전의 음침한 흡정결계와는 차원이 다른, 순수하면서도 압도적인 파괴의 기운이었다.
영력의 폭풍이 흩뿌려진 수정 조각들을 공중으로 띄웠고, 그 파괴적인 기운은 지하 공간 전체를 진동시켰다.
명암은 이 광경에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것들… 네놈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력의 폭풍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혼돈 그 자체였다. 거대한 몸집, 온몸을 뒤덮은 검붉은 비늘, 그리고 그 비늘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암흑의 기운. 그 형체는 마치 심연의 악마가 깨어난 듯,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존재의 정수리 위에는, 섬뜩한 핏빛 안광을 번뜩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제국군 혈무대장군, 강휘.
그의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걸렸다.
“이제부터, 진짜 지옥을 보여주마.”
강휘의 눈빛은 진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진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가 부순 것은 결계의 핵이 아니었다. 거대한 제국의 심장이자, 이곳 흑랑진의 지하에 봉인되어 있던 재앙 그 자체를 깨워버린 것이다.
들불의 함성은 아직 흑랑진 위를 울리고 있었지만, 진의 귓가에는 오직 강휘의 섬뜩한 목소리만이 맴돌았다.
“어서 와라… 들불. 나의 장난감이 되어줄 테면.”
지하 전체를 뒤흔드는 강휘의 냉혹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은 끓어오르는 공포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장난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