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게임 (VRMMO) 독립적인 단편 소설

지우는 방금 막 경매에서 낙찰받은 78층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미궁도시: 아르카나>. 이 게임은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인 그래픽과 물리 엔진, 그리고 어딘가 삐딱하게 뒤틀린 도시의 전설들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 지우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모든 명성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평범’했다. 모던한 가구, 통창 너머로 펼쳐진 번화가의 야경. 시세보다 조금 싸게 나온 물건이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대박이었다. 젠장, 이러다 내 현실 집값도 오르겠네.

갓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로비에서 산 커피는 언제나처럼 지독하게 쓰고, 현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창밖의 네온사인들이 복잡하게 얽힌 도시의 신경망처럼 빛나고 있었다. 길게 뻗은 고층 빌딩들의 불빛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의 혈관처럼 반짝였다.

“음, 나쁘지 않군.”

지우는 중얼거렸다. 그는 이 게임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것에 익숙했다. 남들은 던전을 돌고 레이드를 뛰었지만, 지우는 도시의 숨겨진 이야기나 기이한 현상을 파헤치는 데 더 큰 흥미를 느꼈다. 이 아파트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새로운 베이스캠프였다.

그때였다. 거실 테이블 위, 분명 중앙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유리잔이 스르륵, 하고 아주 미세하게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착각인가?”

지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뻗어 잔을 다시 중앙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잔에 고정되어 있었다. 10초, 20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착각이었나. 피로했는지 손이 덜덜 떨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잔이 또 다시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확연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가장자리 쪽으로 1밀리미터쯤 밀려났다.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숨을 멈추고 잔을 응시했다. 잔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다.

“버그인가?”

지우는 게임 속에서 온갖 기이한 현상을 겪어봤지만, 사물이 저절로 움직이는 버그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것도 단 1밀리미터씩, 아주 천천히. 개발자들이 그렇게 디테일한 버그를 만들 리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집어 들었다. 차가웠다. 평범한 유리잔이었다.

그날 이후, 현상은 더욱 잦아졌다.

닫아놓은 욕실 문이 활짝 열려 있거나,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저절로 풀려 있거나.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작은 탁상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가장 기이했던 건, 그의 눈앞에서 거실 테이블 위 리모컨이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던 순간이었다. 툭, 하고 무심하게 떨어진 리모컨은 지우의 심장을 순간 움켜쥐었다.

“이건 단순한 버그가 아냐.”

지우는 직감했다.

그는 게임 내 버그 리포트 게시판을 샅샅이 뒤졌다. <미궁도시: 아르카나>의 공식 포럼과 비공식 커뮤니티까지, ‘아파트’, ‘이사’, ‘고층’, ‘가구’ 등 온갖 키워드로 검색했다. 비슷한 ‘오류’를 겪은 유저는 전무했다. 운영자에게 문의 메일을 보냈지만, 돌아온 대답은 언제나 기계적인 매뉴얼뿐이었다. ‘게임 내 시스템 오류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게임을 재접속하거나 클라이언트를 재설치해보시길 권합니다.’ 젠장, 다 해봤잖아. 지우는 키보드를 내리쳤다.

그때부터 지우는 아파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경매 기록을 뒤지고, 주변 NPC들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아파트 주변 편의점 직원, 경비원, 심지어 재활용 수거하는 NPC에게까지. 하지만 모두들 이 아파트가 ‘평범한 고층 주거지’라고 말할 뿐이었다. 고작해야 “전에 살던 분이 급하게 이사 가셨다”는 둥, 흔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이 아파트에는 뭔가 있었다. 그는 마치 형사가 된 것처럼 아파트 구석구석을 살폈다. 벽을 두드려보고, 바닥을 쓸어보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특이점은 없었다. 완벽하게, 너무나도 완벽하게 평범한 아파트였다.

어느 날 밤, 지우는 침대에 누워 잠시 로그아웃을 고민하고 있었다. 쌓여가는 피로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짓눌려 있었다. 그때, 거실 쪽에서 나지막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흐으윽… 흐으윽…”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생생했다. 지우는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흐느낌은 이내 희미한 속삭임으로 변했다.

“…나가… 나가라고…”

지우는 벌떡 일어났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단순히 기물을 움직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심지어 그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지우는 가상현실 속 인벤토리에서 늘 들고 다니던 한손검을 꺼내 들었다. 게임 속에서 구현된 검은 언제나 든든한 동반자였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무게감이 손아귀에 실렸다. 거실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한 지점만 유난히 검게 느껴졌다. 거실의 한쪽 벽면, 전에 없던 희미한 얼룩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던 것처럼, 어둠이 번져나가는 얼룩이었다.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대형 텔레비전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켜졌다. 아무도 리모컨을 누르지 않았다. 화면 가득 노이즈가 일렁였고, 그 사이로 희미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 슬픔에 잠긴 듯한 흐릿한 눈동자. 그리고는 화면 가득 붉은 글씨가 피처럼 번져나갔다.

‘나가’

지우는 칼을 움켜쥐었다. 손잡이가 땀으로 축축했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그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자 화면 속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이즈 너머로 그 희미한 형태가 점점 선명해지는 듯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너무나도 서서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섬뜩하리만치 슬펐다.

“…내… 집…”

그 두 글자가 화면에 박히는 순간, 지우의 머릿속에 섬광이 스쳤다.

경매 기록. 시세보다 현저히 저렴한 가격. 매도자의 정보는 ‘시스템 상 미확인’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전에 살던 분이 급하게 이사 가셨다’는 NPC의 말. 단순한 버그가 아니었다. 이건… 게임 속에서 ‘사라진’ 자의 흔적이었다. 이 아파트의 이전 주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게임 속에서 ‘사라졌고’, 그녀의 의지가, 아니 그녀의 영혼이 이 공간에 남아있는 것이다.

지우는 천천히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화면 속 흐느끼는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이 뒤섞인 감정이 화면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네가 여기에 살았었구나.”

지우가 나직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떨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화면 속 그림자가 움찔했다. 노이즈가 더욱 심하게 일렁였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준 것에 대한 감격처럼.

“누구도… 날 찾지 않아…”

희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흐느낌에 섞여 공기 중에 흩어졌다.

“아무도… 날 기억하지 않아…”

지우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건 공포가 아니었다. 고독이었다. 억울함이었다. 게임 시스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한 영혼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지우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거실의 한기를 무시한 채, 그는 화면을 향해 말했다.

“나는 네가 여기 있었다는 걸 알아. 이제부터 너를 기억할게. 네 집을… 잘 돌봐줄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화면의 노이즈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림자는 여전히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희미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거실을 맴돌던 기괴한 한기도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텔레비전 화면은 이내 푸른빛만 남긴 채 천천히 꺼졌다.

그날 이후, 아파트에서는 더 이상 기이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우는 가끔 거실 벽의 희미한 얼룩을 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아주 가끔, 깊은 밤에 희미한 흐느낌 대신,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고마워…”

지우는 알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 또한, 이 기이하고 미궁 같은 도시 속에서 또 다른 진실과 마주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의 눈은 새로운 미스터리를 좇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