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산자락을 한참 헤매다 보면 세상의 끝에 다다른 기분이 들곤 했다. 지혁은 그런 기분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낡은 등산화는 흙먼지로 범벅이었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이마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생기 넘쳤다. 전설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시간의 사원’ 흔적을 찾아 몇 년째 전국을 떠돌고 있었다. 고문헌에는 희미하게 언급될 뿐, 정확한 위치는 물론 실존 여부조차 불분명한 유적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 불렀지만, 지혁은 그런 시선 따윈 개의치 않았다.

“젠장, 또 막다른 길인가.”

깎아지른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혁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발아래로는 아득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고, 이끼 낀 바위들만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오늘로 벌써 사흘째,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또다시 야영을 해야 할 판이었다.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와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처럼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미끄러운 바위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마치 누군가 랜턴을 켜놓은 듯 희미하게 깜빡이는 빛이었다. 지혁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설마…?”

떨리는 손으로 덩굴을 헤치고 바위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거친 흙과 돌멩이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지만, 지혁은 오직 그 빛을 향해 나아갔다. 좁디좁은 통로를 한참 기어가자, 거짓말처럼 공간이 탁 트이며 고대 사원의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이 무너지고 벽이 허물어진 폐허였지만, 그 기운만은 압도적이었다.

먼지 가득한 공간의 중앙에는, 온전히 형태를 유지한 채 서 있는 석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석판은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웠고, 그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자들이, 바로 그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석판 주변의 공기는 다른 곳과 달리 서늘했고, 미약한 전류라도 흐르는 듯 피부에 닿는 감각이 남달랐다.

지혁은 홀린 듯 석판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표면을 쓸었다. 거칠지 않고, 차갑지도 않았다. 오히려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손끝이 글자에 닿는 순간, 석판에서 푸른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온 세상이 뒤틀리는 착각에 빠졌다. 푸른빛은 마치 살아있는 물결처럼 지혁의 몸을 감쌌고, 그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방금 전의 폐허와는 완전히 달랐다.

무너진 천장 대신 화려한 단청이 그려진 천장이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갈라진 벽 틈새가 아닌, 정교하게 쌓아 올린 돌벽에는 신비로운 벽화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변에는 먼지 대신 향긋한 풀 내음이 감돌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경쾌하고 활기찼다. 고요하던 폐허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명력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지혁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흙먼지투성이였던 손은 말끔했고, 찢어졌던 바지 무릎도 멀쩡했다.

“이게… 뭐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의 목소리는 낯설게 울렸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보시오, 소년. 여기서 그리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아니오. 곧 제의가 시작될 터인데, 준비는 다 마쳤소?”

돌아보니, 낯선 옷차림의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고풍스러운 복식이었다. 노인의 뒤로는 그와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지혁을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 없이, 그저 자신들의 일에 몰두하는 듯했다.

지혁은 혼란스러웠다. 꿈인가? 아니,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피부에 와닿는 공기의 온도,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눈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이 현실 그 자체였다. 그는 다시 석판이 있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석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푸른빛 대신 희미한 은빛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지혁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의 사원’. 전설 속에만 존재한다는 그곳이, 사실은 시간을 넘나드는 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신이, 지금 그 문을 통해 과거로 넘어온 것이라면?

그는 노인에게 더 말을 걸려 했지만, 노인은 이미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지혁은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지만, 그의 직감은 이것이 현실이라고 속삭였다.

“이게… 진짜라고?”

떨리는 손을 뻗어, 눈앞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을 꺾었다. 꽃잎은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손에 쥔 꽃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가, 다시 석판으로 향했다. 직감이 말했다. 석판이 과거로 온 유일한 길이라면, 다시 현재로 돌아갈 길도 석판뿐일 터였다.

지혁은 용기를 내어 다시 석판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글자를 어루만지는 대신, 온몸의 감각을 집중했다. 석판의 차가운 표면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희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났도다….’*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이….’*

목소리는 웅얼거렸고,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석판이 그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대 언어인 듯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신기하게도 해석되고 있었다.

지혁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정신을 집중하며,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석판에 전하려 했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듯했지만, 그는 굳건히 버텼다.

**휘이이잉-!**

푸른빛이 다시 한번 솟구쳤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이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다시 한번 시공간이 뒤틀리는 경험을 했다. 눈을 떴을 때, 지혁은 다시 폐허 속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 과거에서 꺾었던 이름 모를 들꽃이 들려 있었다. 시들지 않고, 방금 꺾은 것처럼 싱싱했다. 폐허의 건조하고 삭막한 공기 속에서, 그 푸른 꽃은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빛났다.

“성공했어… 정말로 성공했어!”

지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꽃을 바라봤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그는 석판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석판은 여전히 희미한 은빛을 띠고 있었지만, 아까와는 다른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글자들이 더 선명해진 것 같기도, 혹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문양들이 떠오른 것 같기도 했다.

*‘환영하노라, 시간의 지기여….’*

이번에는 훨씬 또렷한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 울렸다. 마치 석판 자체가 그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지혁은 무릎을 꿇고 석판을 어루만졌다. 오랜 전설 속 유물이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마법이었고, 시간을 넘나드는 힘을 가진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그 힘이 그의 손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시간의 지기…?”

그는 문득 자신이 짊어지게 될 무게를 깨달았다.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 이 힘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며, 자신은 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은, 무엇을 해야만 할까?

석판의 문양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질문에 답이라도 하려는 듯, 혹은 더 깊은 비밀을 보여주려는 듯. 지혁은 폐허 속에서 홀로, 새롭게 시작될 자신의 운명 앞에서 숨을 골랐다. 그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어쩌면 이 석판은, 단순히 시간을 오가는 것 이상의 힘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고대의 마법이, 그의 손안에서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