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도리아 아카데미의 낡은 시계탑이 째깍거리는 소리는 이제 환청에 가까웠다. 대균열 이후, 세상은 마법과 괴물이 뒤섞인 지옥이 되었고, 한때 마법사들의 요람이었던 이곳만이 겨우 형태를 유지한 채 우리 같은 생존자들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거대한 아카데미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동력원. 메인 발전기는 몇 년 전 이미 고철이 되었고, 비상 발전기마저 오늘내일하는 지경이었다. 마지막 희망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아카데미의 심장’이라 불리던 미지의 동력원에 있었다.
“미나, 그 지도를 다시 확인해 봐. 정말 지하 3층에 그런 게 있다고?”
재하는 손때 묻은 낡은 홀로그램 지도를 노려봤다. 지도는 파직거리는 노이즈를 뿜어내며 희미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파란색 점멸은 미지의 동력원을 나타냈고, 그 주변은 붉은색으로 ‘접근 금지’를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경고는 공포가 아닌 조롱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굶어 죽을 판에, 금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네, 재하 오빠. 선배님들 말씀으로는, 아주 오래전 봉인된 구역이래요. ‘원죄의 전당’이라고도 불렸대요. 아마… 끔찍한 실험이나 금지된 마법이 행해지던 곳이었을지도 몰라요.”
미나는 작은 손전등으로 지도를 비췄다. 그녀의 눈빛에는 불안감과 호기심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나고 자란 미나는, 멸망 전 세상의 빛바랜 영광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어릴 때부터 마나에 민감했고, 낡은 마도서를 더듬어 익힌 지식은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의 어두운 과거에 대한 두려움도 깊었다.
“금지된 것이든 뭐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순 없어. 발전기가 멈추면, 모든 마법 방벽도 무너질 테고… 그럼 우리는 끝장이야.”
재하는 허리춤에 찬 마법 단검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마나 코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단검은 이제 거의 장식품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빈손보다는 나았다. 재하는 한때 대균열 이전의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총 한 자루와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버텨왔지만, 이곳 엘도리아 아카데미에서는 마법과 괴물의 논리가 더 우위에 있었다. 이젠 그도 마법의 잔재에 의존해야만 했다.
“가자.”
재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미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들이 택한 길은 도서관의 폐허 뒤쪽에 숨겨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비밀 통로였다. 수십 년간 쌓인 먼지와 거미줄을 헤치고 나아가자, 낡은 철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철문이 아니었다. 표면에는 미끈한 이끼와 함께 오래된 룬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룬 문자는 희미한 푸른빛을 띠며, 이 문이 보통의 것이 아님을 웅변하고 있었다.
“이봐, 이거… 잠금이 보통이 아닌데?”
재하가 손을 대자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봉인 마법. 강력하고 오래된 마법이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어떤 파동이 터져 나올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제가 해볼게요.”
미나는 작은 마나석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이 아카데미에서 자란 몇 안 되는 마법사였다. 낡은 마도서를 더듬어 익힌 마법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빛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미나는 철문 앞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흐릿한 마나의 기운이 맴돌았다. 섬세한 손가락이 공중에서 춤추듯 움직이며 복잡한 마법진을 그렸다.
“개방….”
미나의 나지막한 주문과 함께, 철문 표면의 룬 문자들이 섬광을 뿜어내며 격렬하게 진동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철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안에서는 곰팡이 냄새와 함께 묵직한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냉기는 단순히 온도가 낮은 것을 넘어, 영혼을 꿰뚫는 듯한 서늘함이 있었다.
“젠장… 여기 몇백 년은 폐쇄되어 있었던 것 같군.”
재하가 코를 막았다. 내부의 공기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좁은 통로였다. 천장은 낮았고, 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마법 문양이거나, 혹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상징들. 마치 인간의 그림자가 뱀처럼 기어 다니는 듯한 형상들이었다.
“이상해요… 여기 마나의 흐름이… 왜 이렇게 뒤틀려 있죠?”
미나는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마나의 흐름을 눈으로 보는 듯이 느끼는 능력이 있었다. “오염된 마나 같아요. 마치 죽음과 고통을 머금은 마나….”
발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디뎠다. 통로는 아래로 계속 이어졌다. 홀로그램 지도를 확인하자 파란색 점멸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지도의 붉은색 경고 구역도 넓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여기는 지하 3층이 아니야… 더 깊어.”
재하는 지도와 대조해 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들어온 곳은 기존의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통로 끝에는 낡은 제어판이 보였다. 먼지투성이였지만, 여전히 희미한 빛을 내뿜는 마나석이 박혀 있었다.
“숨겨진 층이었나 보네요… 아마 봉인된 이유가 있었겠죠.”
미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였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듯한 깊은 공포.
통로의 끝은 거대한 원형 홀로 이어졌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홀 안으로 발을 디뎠다. 홀은 어두웠지만, 중앙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단순히 숨 쉬기가 힘든 정도가 아니라, 정신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이건… 대체…?” 재하의 시선이 고정됐다.
거대한 원형 홀 중앙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십 개의 거대한 유리관이 거대한 기계 장치에 복잡한 마나 파이프와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리관 안에는 끈적하고 탁한 황록색 액체가 가득 차 있었고, 그 안에는…
“아니… 저건…!” 미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유리관 속에는 기괴하고 뒤틀린 형태의 생명체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온전한 인간의 모습도, 그렇다고 완벽한 괴물의 모습도 아니었다. 어떤 것은 척추가 뒤틀려 팔다리가 서너 개씩 솟아 있었고, 어떤 것은 피부가 벗겨진 채 내장이 외부로 노출되어 있었다. 또 어떤 것은 서로 다른 생명체의 조각들이 억지로 이어 붙여진 듯한 흉측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설령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해도, 모두 똑같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그들의 눈동자에 응축되어 있었다. 거대한 기계 장치는 그들의 생명을 억지로 유지시키고 있었다.
“생체 마법 실험… 인간을… 재조합한 건가?”
재하의 목소리에 역겨움과 분노가 실렸다. 이 아카데미의 선배들이 저지른 짓이란 말인가? 한때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엘리트 마법사들이?
“살아있어요… 모두 살아있어요, 오빠…”
미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고통받는 존재들의 뒤틀린 마나 흐름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마나는 슬픔, 분노, 절규, 그리고 끝없는 고통으로 오염되어 홀 전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 순간, 홀 중앙의 거대한 기계 장치에서 둔탁한 진동음과 함께 희미한 붉은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파직거리는 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이런, 작동하는 건가?” 재하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빛이 점차 강해지더니, 유리관 속의 피조물들이 일제히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침묵하던 고통이 기이한 비명으로 변해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하나의 유리관이 버티지 못하고 균열하며 끈적한 액체를 뿜어냈다. 그리고 그 안의 기형적인 팔이 밖으로 뻗어져 나왔다. 손가락이 기형적으로 뒤틀린 팔은 허공을 움켜쥐려 애썼다.
“미나! 도망쳐!”
재하는 소리쳤지만, 때는 늦었다. 홀 중앙의 거대한 장치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며 엄청난 마나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사방의 유리관들이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하나둘씩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유리 파편이 튀고, 황록색 액체가 바닥에 흥건히 흘러내렸다.
끔찍한 비명 소리가 홀을 가득 채우고, 액체 속에서 기어나오는 기형적인 그림자들이 그들을 향해 느릿하지만, 멈출 수 없는 움직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재하는 단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뒤틀린 생명체들의 고통과 분노가 마나로 형상화되어 그들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이곳은 단순한 금기가 아니었다. 지옥의 입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