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또 꽝이잖아!”
이클립스, 본명 강민준은 화면 너머로 작게 투덜거렸다. 거대한 바위골렘의 핵을 부수자마자 희망을 걸었던 아이템 창이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지난 두 시간 동안 잿빛 사막을 헤매며 잡은 몬스터들이 죄다 시시한 ‘잡템’이나 경험치 몇 푼만 안겨줬으니까.
그가 플레이하는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나: 에테르의 각인』은 방대한 세계관과 압도적인 자유도를 자랑하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 자유도만큼이나 유저들에게 불친절한 시스템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특히 ‘잊힌 자들의 심장부’라 불리는 이 잿빛 사막 지역은 고레벨 유저들조차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몬스터들의 난이도는 높은 주제에 드랍되는 아이템은 형편없었고, 숨겨진 퀘스트나 유니크 던전의 단서조차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진짜 만년 비주류 클래스 신세 못 면하겠네.”
이클립스는 자신의 캐릭터 정보창을 띄워 보았다. [클래스: 어둠의 추격자]. 나쁘지 않은 클래스였지만, 지금 메타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는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였다. 기동성과 은신에 특화된 딜러 포지션이었지만, 어정쩡한 딜량과 낮은 방어력 때문에 파티 플레이에서는 늘 찬밥 신세였다. 뭔가 한 방이 필요했다. 남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히든 피스’가 간절했다.
결국,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했다. 버려진 사막의 서쪽 끝, 게임 지도에조차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 ‘미탐사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곳에 자신만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서.
사막의 열기는 헬멧의 통풍 시스템을 뚫고 들어오는 듯 생생했다. 모래폭풍이 휩쓸고 간 흔적인지, 곳곳에는 기괴하게 깎인 암석 기둥들이 널려 있었다. 붉은 노을이 사막을 물들이고, 멀리 보이는 지평선은 황량함의 극치를 달렸다. 그는 묵묵히 걸었다. 게임 내 시간으로 이틀째, 현실 시간으로는 약 세 시간 정도를 그렇게 걸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붉게 물든 바위 언덕 너머로 뭔가 인위적인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사원 건축물의 잔해. 완벽하게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모래와 바람에 깎여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린 채였다.
“어, 저런 곳이 있었나?”
이클립스는 의아해하며 사원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도를 확인해봤지만, 그곳은 여전히 미탐사 지역으로, 어떤 건물이나 오브젝트의 정보도 뜨지 않았다. 그저 밋밋한 붉은색 지형으로만 표시될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사원의 규모가 짐작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돌기둥들은 부러져 모래에 파묻혔고, 벽화의 흔적은 희미하게 남아 어렴풋이 고대 문양을 연상케 했다. 사원 내부로 향하는 입구는 거대한 바위 더미에 막혀 있었지만, 한쪽 구석에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틈새가 보였다.
‘설마… 히든 던전인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 게임에서 미탐사 지역의 버려진 건축물은 종종 히든 던전의 입구인 경우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함정 투성이거나 보상 없는 꽝이었지만, 이클립스는 본능적으로 이곳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안쪽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어둡고 축축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스마트 헬멧의 광원 기능을 켜자, 낡은 석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천장은 이미 무너져 내려 모래와 돌덩이가 가득했고, 바닥은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벽에는 훼손된 벽화가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는데, 인간형의 존재들이 하늘의 별과 교감하는 듯한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특이한 점은, 벽화 속 인물들의 몸에서 마치 별똥별처럼 빛나는 푸른색 선들이 뻗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고대 문명 관련인가?”
이클립스는 호기심에 벽화에 손을 댔다. 하지만 그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손상된 고대 벽화입니다. 더 이상 정보를 추출할 수 없습니다.]
[더 깊은 곳에서 강력한 마력의 흔적이 감지됩니다.]
그는 메시지를 따라 벽화가 끝나는 곳, 무너진 천장 더미 사이의 작은 틈을 발견했다. 몸을 숙여 틈으로 기어들어가자, 아래로 향하는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 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통로는 짧았다. 이내 작은 원형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곳은 지금까지의 황량하고 파괴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천장은 뚫려 있었지만, 그 아래로는 꽤 온전한 형태의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은 중앙에 솟아 있었고, 그 위에는 칠흑 같은 검은색 돌이 놓여 있었다. 돌은 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않았지만, 그 표면에는 희미하게 푸른빛이 도는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문자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제단 주위로는 여섯 개의 작은 돌기둥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각각의 기둥 위에는 푸른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보석들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이클립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보통 오브젝트가 아니었다. 보통의 유니크 아이템이나 퀘스트용 오브젝트와는 격이 다른, 엄청난 아우라가 느껴졌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수만 년의 세월을 응축한 듯한 고요하고 웅장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제단에 다가갔다. 중앙의 검은 돌에 손을 대자,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끝을 스쳤다.
[미확인된 고대 제단입니다.]
[제단의 기운이 당신의 에테르와 공명합니다.]
[접근하시겠습니까?]
이클립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예’를 선택하자, 제단 주위의 여섯 개의 보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점차 강렬해지더니, 거대한 에테르 흐름을 형성하며 제단 중앙의 검은 돌로 빨려 들어갔다.
콰아아앙!
귀청을 찢는듯한 굉음과 함께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천장에서 잔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클립스는 반사적으로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눈을 다시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은 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빛은 이클립스의 몸을 감싸 안더니, 그의 정신을 아득히 먼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했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 귓가에 알 수 없는 고대 언어가 들려왔다. 마치 수천 년 전의 속삭임처럼, 태초의 마력이 그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명한 시스템 메시지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히든 클래스 ‘에테르 각인자’의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고대 에테르의 힘이 당신의 육체와 정신에 새겨집니다.]
[초월적인 힘에 적응하기 위해 의식을 잃습니다.]
[시스템이 일정 시간 동안 강제 종료됩니다.]
“엣…?”
이클립스의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기 직전, 그의 헬멧 아래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망할 놈의 비주류 클래스 신세, 이제 정말 끝인가? 그의 머릿속은 오직 그 생각 하나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는 길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모래폭풍이 다시 사막을 휩쓸기 시작했다. 무너진 사원의 잔해는 그렇게 또다시 모래에 파묻히며, 그 안에서 벌어진 놀라운 변화를 감추었다. 다음 태양이 떠오를 때, 아르카나의 세계에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변수가 등장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