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깊어진 ‘망각의 숲’ 심연.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고대 심연의 수호자’가 내뿜는 괴성에도 숲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은 놈의 존재감 때문이 아니라, 숨 막히는 긴장감 탓이었다. 수호자의 붉은 눈은 숲을 꿰뚫듯 맹렬하게 빛나고 있었고, 놈의 앞에는 백여 명이 넘는 유저들이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태준님, 보스의 광역기가 곧 터집니다! 후방 딜러들 조심하세요!”
날카로운 외침이 숲을 가르며 울렸다. 천마전쟁단. 한때 이 게임 ‘아르카디아’에서 ‘새벽의 기사단’과 쌍벽을 이루던 길드였지만, 이제는 새벽의 기사단조차 집어삼키고 아르카디아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는 거대 길드였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자, ‘이태준’. 내 옛 친구이자, 나락으로 떨어뜨린 배신자.
이태준은 보스의 움직임을 냉철하게 주시하며 손가락으로 전장을 지휘했다. 한때 내 옆에서 서글서글한 미소로 길드원들을 독려하던 그의 얼굴에는 이제 차가운 자신감과 지배자의 오만이 서려 있었다.
나는 숲의 가장 깊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블랙 세이버’. 지금의 나는 그저 듣도 보도 못한 신참 유저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 안에는 강진우로서의 모든 기억과, 놈에게 짓밟힌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번에 천마전쟁단이 노리는 것은 ‘심연의 수호자’가 드랍하는 전설급 방어구, ‘칠흑의 갑옷’만이 아니었다. 놈의 몸속에 잠들어 있다는 ‘어둠의 심장핵’. 그것이야말로 내 ‘영혼의 조각’ 시스템을 완성할 열쇠였다. 망가진 내 캐릭터, 사라진 모든 것들을 되찾고, 태준을 끌어내릴 유일한 방법.
“방패병들, 어그로 유지! 광폭화 패턴 진입이다!”
태준의 외침과 함께 수호자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폭발했다. 땅이 흔들리고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나가는 맹렬한 공격. 천마전쟁단의 정예 길드원들이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몇몇 딜러들은 범위 안에 휘말려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나는 움직였다. 그림자처럼 숲을 가로질러 수호자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내 손에 쥐어진 ‘환영의 단검’이 어둠을 머금고 번뜩였다. 수호자의 공격에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나는 단검으로 놈의 거대한 다리 힘줄을 정확히 꿰뚫었다.
*콰직!*
“크아아아악!”
수호자의 괴성이 더욱 커졌다. 놈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내 공격은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놈의 움직임을 일순간 교란시켰다.
“뭐야?! 보스 어그로가 왜 튀지?”
“다른 길드가 난입한 건가?!”
천마전쟁단의 길드원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태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놈은 재빨리 숲 주변을 훑어봤지만, 그림자뿐이었다.
“잡몹인가? 무시하고 보스에 집중해!”
태준의 냉철한 판단에 길드원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수호자의 뒤편으로 돌아가 있었다. 내 손끝에서 어둠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암흑 사슬.’
어둠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수호자의 거대한 몸을 휘감았다. 일시적으로 놈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나는 보스 몬스터의 약점, 심장 부위를 향해 단검을 꽂아 넣었다.
*쩌저적!*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불가능한 ‘관통’ 피해가 터졌다. 심연의 수호자가 절규하며 몸부림쳤다. 놈의 거대한 몸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내 눈앞에 떴다.
[당신이 ‘고대 심연의 수호자’에게 ‘심연 핵 분리’ 효과를 부여했습니다.]
성공이다. 내가 노리던 것은 수호자의 처치가 아니었다. 심장핵을 ‘분리’시키는 것. 수호자가 죽기 직전, 그 심장핵은 봉인에서 벗어나 잠시 노출되는 순간이 온다. 그때가 내게는 기회였다.
“뭐야, 저 딜은? 방금 뭐였어?!”
천마전쟁단 길드원들의 혼란스러운 외침이 귓가에 들려왔다. 태준의 얼굴에는 이제 명백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다른 유저야! 그런데 저 딜량은… 설마 저 보스를 혼자 잡을 생각인가?”
태준은 나를 ‘새로운 경쟁자’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그래, 아직은 그걸로 충분하다.
수호자의 체력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천마전쟁단의 딜러들이 맹공을 퍼부었다. 놈의 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수호자의 심장이 위치한 부위에서 섬뜩한 어둠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검은색 심장이 외부로 드러나는 순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갔다. 내 몸이 어둠에 완전히 녹아들었다가, 순간적으로 심장핵 바로 위로 나타났다.
‘공간 왜곡’ 스킬. 내가 과거에 숨겨진 퀘스트를 통해 얻은, 태준조차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능력.
“저 자식 뭐야?! 저기서 나타났어?!”
천마전쟁단 길드원들의 경악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태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놈의 얼굴에는 그제야 의심과 함께, 낯선 기시감이 떠오르는 듯했다.
내 단검이 심장핵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태준의 명령이 귀청이 터질 듯 울렸다.
“저 자식 막아! 심장핵 건드리면 안 돼!”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단검이 어둠의 심장핵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아앙!*
심장핵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뽑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진동이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당신이 ‘어둠의 심장핵’을 획득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내 손에는 섬뜩한 검은색 결정체가 들려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뛰는 듯한 기분 나쁜 온기가 느껴졌다.
“젠장! 무슨 짓이야! 저 새끼 잡아!”
태준의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길드원들이 일제히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심장핵을 획득한 순간, 이미 다음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림자 도약.’
내 몸이 다시 한번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수백 미터 떨어진 숲의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천마전쟁단 길드원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워진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잠시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태준과 길드원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심장핵이 뽑혀나간 수호자의 시체를 보고 있었다. 수호자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심장핵을 잃은 채 광폭하게 날뛰며 남은 천마전쟁단 길드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혼란 속에서 태준은 숲을 향해 고개를 돌려 나를 찾고 있었다. 놈의 눈에 서린 것은 분노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나는 놈의 시선을 느끼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태준.’
내 손에 들린 심장핵이 미약하게 빛났다. 이걸 흡수하면, 놈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는 그저 단순한 어둠 속의 경쟁자가 아니라, 그림자 속에서 놈의 모든 것을 갉아먹을 악몽이 될 테니.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기다려, 이태준. 너의 그 오만한 미소를, 내가 직접 찢어버릴 테니까.”
내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