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후두둑 숲을 때렸다. 지혁은 젖은 나뭇가지에 얼굴을 스치며 허옇게 질린 숨을 내쉬었다. 발밑의 흙은 질척거렸고, 썩은 낙엽 냄새가 비릿하게 코를 찔렀다. 망자의 숲. 이름처럼 모든 것이 죽어가는 곳,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태어나서는 안 될 방식으로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녹슨 덩굴에 휘감긴 신전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의 형태를 잃고 기이하게 솟아오른 검은 돌기둥들, 비에 젖어 더욱 검게 빛나는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거인의 뼈대처럼 음산하게 서 있었다. 지혁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며칠 밤낮을 잠들지 못한 것도 모자라, 온몸의 기운이 뿌리 뽑히는 듯한 탈력감에 시달렸다. 그의 피부는 이제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달빛에 바랜 조약돌처럼 창백했고, 손끝에서는 푸른 빛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이셀과의 시간이 그에게 준 대가였다.
“이셀…….”
메마른 목소리가 숲의 정적에 흡수되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신전의 입구를 향했다. 깨진 아치형 문을 통과하자, 바깥의 폭풍우 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신전 내부는 습하고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비는 한 방울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태초의 우주를 형상화한 듯,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뒤틀리고 얽혀 있었다. 그 중심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지혁.”
어둠 속에서 속삭임이 들렸다. 달콤하면서도 동시에 얼어붙을 듯한 목소리. 등골이 오싹했지만, 지혁은 웃었다. 절반쯤 죽어가는 육신으로 내는, 희미한 웃음이었다.
거대한 제단 위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이셀.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완벽한 인간 여성의 형상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고, 붉은 입술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만은 예외였다. 심연의 밤하늘을 닮은 검푸른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환영이 담겨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 별빛이 너무나 강렬해서, 인간의 정신은 쉬이 부서지고 말았다.
지혁은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푸른 빛을 머금은 손이 뻗어져 나왔다. 이셀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차가운 육신에 온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오지 못할까 봐…….”
이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고요했기에, 미세한 떨림조차도 지혁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오는 길에… 조금 시간이 걸렸어.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는 애써 웃어 보였다. 손끝의 푸른 빛은 이제 그의 팔 전체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핏줄이 도드라진 팔 위로, 섬뜩한 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이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안에서 별들이 격렬하게 폭발하는 듯했다.
“나 때문이야. 당신의 육신이, 나의 존재를 견디지 못하고 있어.”
“아니. 내가 너무 약해서 그래. 네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지혁은 고통으로 비틀리는 얼굴에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육신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이셀의 존재는 그 모든 고통을 초월하는 기쁨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한 순간이, 영겁의 평화보다 소중했다.
이셀은 그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차가운 몸이 그의 푸른 육신에 닿자, 지혁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죄어왔다. 동시에, 잊고 있던 온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기이하고 모순적인 감각이었다.
“당신은 죽어가고 있어, 지혁. 나의 심연이 당신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어. 내가 당신을 사랑할수록, 당신은 소멸에 가까워져.”
“알아.” 지혁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알 수 없는 향기가 났다. 이 세상의 어떤 꽃도 흉내 낼 수 없는, 태초의 정적 같은 향기였다. “알지만, 어쩔 수 없어. 당신 없는 세상은, 이미 내게 지옥이야. 차라리 당신 품에서 한 줌의 재가 되는 게 나아.”
그의 말에 이셀의 몸이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다른 존재들과는 달라. 사랑이란 감정은, 내게는 무의미한 개념이었어. 나의 존재는 오직 균형을 지키는 것에만 의미가 있었지. 그런데 당신이 나타났어. 망자의 숲에 갇힌 나를 찾아왔어. 그리고…….”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셀은 고개를 들어 지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피로와 함께, 그녀를 향한 맹목적인 열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줬지.” 지혁이 속삭였다. “두려움과 경외심을 넘어선, 이끌림을 가르쳐줬어.”
그들의 시선이 얽혔다. 심연의 눈동자와, 점멸하는 푸른빛의 눈동자.
그때, 신전의 돌벽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드드득’ 하고, 마치 거대한 뼈대가 뒤틀리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었다. 바닥의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제단 뒤편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이셀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들이… 감지했어. 우리의 불경한 결합을.”
“누구?” 지혁이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전 내부의 어둠이 점점 더 짙어지고, 문양들은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공기 중에는 묘한 압력이 가해졌다.
“나의 동족. 내가 수천 년 동안 지켜온 균형을 파괴하려는 존재들.” 이셀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제단 주위에 있던 알 수 없는 비석들이 일제히 푸른 빛을 발했다.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봉인하고, 이 숲을 지켰어. 인간 세상의 시간과 단절되어 있었지. 하지만 당신과의 만남은, 나의 결계를 흔들었어. 그리고 그 틈을 타, 그들이 깨어나고 있어.”
“그들이 뭘 원하는 건데?” 지혁은 불안했지만, 이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주어 잡았다.
“우리의 존재를 말살하려 할 거야. 나를 원래의 차원으로 돌려보내고, 당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려 들겠지. 금지된 사랑에 대한 대가다.”
신전의 벽에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징그러운 형태로 변했다. 비명 없는 절규가 지혁의 귓전을 때렸다. 환청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의 육신은 더욱 강렬하게 푸른빛을 내뿜으며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셀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 별들이 한 점으로 수렴하는 듯했다. “절대로.”
그녀는 지혁의 뺨을 감싸 안았다. 차가운 손끝이 그의 창백한 피부에 닿았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어. 지혁. 선택해야 해. 나를 떠나, 너의 남은 삶을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나와 함께, 이 모든 것을 거부할 것인가.”
벽에서 솟아난 그림자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신전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듯한 위기 속에서, 지혁은 이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피어난 그의 사랑은, 그 어떤 존재도 꺾을 수 없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어.” 지혁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의 푸른 육신에서 섬뜩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이셀의 존재와 뒤섞이며, 신전의 어둠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있는 곳이, 내 세상이야. 이셀.”
그의 마지막 말이 공기를 찢었다. 이셀은 지혁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심연과 그의 푸른 빛이 충돌하며, 신전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외부의 숲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신전의 문양들은 이제 눈부신 섬광을 내뿜었고, 어둠 속에서 솟아났던 그림자들은 그 빛에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금지된 사랑은, 모든 것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그 파괴의 중심에 서기로 결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