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빛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세계에서 강슬기는 오늘도 한 조각의 평화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무너진 빌딩의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찌르고, 그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낡은 철골 구조물들을 흔들었다. 그녀의 등에는 언제나처럼 잘 관리된 석궁이 메어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녹슨 단검이 자리했다. 슬기의 삶은 간단했다. 살아남고, 경계하고, 그리고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한때 ‘마트’라고 불렸을 거대한 폐허였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 앙상한 프레임만 남았고, 내부에는 상품 대신 잔해와 먼지만 가득했다. 하지만 이따금, 운이 좋으면 썩지 않은 통조림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는 노다지였다. 슬기는 조심스럽게 문틀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삐걱거리는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어이쿠!”

그때였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사람의 비명. 슬기의 심장이 발끝까지 쿵 떨어졌다. 이런 폐허에서 다른 생존자를 만나는 건 보통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녀는 즉시 석궁을 겨누고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숨겼다.

“젠장, 이게 뭐야! 아, 내 발!”

들려오는 목소리는 경계심보다는 짜증이 가득했다. 슬기는 조심스럽게 파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는 좀 달랐다.

한 남자가 무너진 선반 잔해에 다리가 끼여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찌그러진 컵라면 봉투가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희한하게도 미련이 가득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지저분한 옷차림과 헝클어진 머리, 하지만 그 와중에도 왠지 모르게 낙천적인 기운이 풍기는 사람이었다.

“아이고, 통조림 코너인 줄 알고 신나게 돌진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야. 김치찌개 라면이 찌개 될 판이네!”

슬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라면 하나 때문에 저렇게 투덜거리는 사람이라니. 그녀는 석궁을 내리고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그제야 슬기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여기 사람이 있었네? 설마 나 구해주러 온 건가요? 이야, 역시! 천사였어, 천사!”

“닥쳐.” 슬기는 짧게 쏘아붙였다. “시끄러워. 네 덕분에 이 주변에 있는 모든 잡것들이 다 몰려들겠다.”

남자는 입을 삐죽거렸다. “에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래도 조난당한 사람인데. 이름이 뭐예요? 전 김도윤입니다! 김치찌개 라면을 사랑하는 김도윤!”

“강슬기.” 그녀는 마지못해 답했다. 그리고는 남자의 다리를 훑어봤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선반 잔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와! 힘도 좋으시네요, 슬기 씨! 어쩜 그렇게 쿨할 수가 있어?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도윤은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나와.” 슬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간신히 선반을 밀어내자 도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다리를 털고 일어나며 신이 난 듯 말했다.

“크으, 슬기 씨 아니었으면 김치찌개 라면의 유령이 될 뻔했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혹시 목마르지 않아요? 저기, 녹슨 자판기 아래에 아직 물통 하나가 살아있을지도!” 그는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슬기는 의심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그게 진짜 있을 리가.”

하지만 도윤은 이미 신나게 깡총거리며 자판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에이, 일단 가봐야 아는 거죠! 안 가보면 백 퍼센트 없는 거고, 가보면 오십 퍼센트의 희망은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슬기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식으로 살아남았다는 게 더 신기했다. 하지만 잠시 후,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 완전 새것 같은 생수통이 박혀 있잖아!”

슬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에게 다가갔다. 정말이었다. 자판기 아래 구석에, 먼지투성이긴 하지만 밀봉된 생수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찾았어?” 슬기가 물었다.

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느낌이 왔어요! 제가 이런 쪽으로는 좀 촉이 좋다니까요? 자, 슬기 씨 먼저 마셔요. 전 아직 라면 국물이 목에 걸려있는 기분이라.” 그는 방긋 웃으며 생수통을 내밀었다.

슬기는 잠시 망설이다 물통을 받아들었다. 차갑고 깨끗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며칠 동안 쌓였던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물통을 도윤에게 건넸다.

“고맙다.” 그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도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헐, 슬기 씨가 고맙다고 했어! 대박! 감격스럽다! 그럼 우리 이제 동료 된 건가? 어때요, 우리 같이 살아남아 볼까요? 둘이 있으면 훨씬 안전하고 덜 심심할 텐데!”

“무슨 소리야. 난 혼자 다니는 게 편해.” 슬기는 얼른 선을 그었다.

“에이, 그래도 아까 나 구해줬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물도 나눠 마셨고! 이 정도면 운명적인 만남 아닌가? 난 슬기 씨가 꽤 든든하던데?” 도윤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때였다. 쩌적, 쩌적. 마트 내부의 어두운 구석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슬기의 표정이 굳었다.

“젠장, 쥐새끼들인가… 아니, 덩치가 좀 큰데?”

도윤의 얼굴에서도 장난기가 사라졌다. “설마… 밤이 되기 전에 피해야 하는 그 녀석들인가? 어두운 곳에선 엄청 빨라지던데!”

어둠 속에서 붉은 눈 두 개가 번뜩였다. 일반적인 쥐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덩치, 그리고 기괴한 울음소리가 공포를 자극했다. 변이된 쥐들이 분명했다. 그것들은 빠르게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쪽으로!” 슬기는 급히 도윤을 이끌고 부서진 계산대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석궁에 화살을 장전했다.

“슬기 씨, 저거 봐! 저 자식들, 진짜 빠르다! 저러다 우릴 한입에 삼키겠어요!” 도윤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정해. 덩치만 컸지 머리는 나빠. 내가 주의를 끌게. 넌 이쪽으로 돌아서 다른 길을 찾아봐.” 슬기는 냉정하게 지시했다. 그녀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다른 방법은 없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 “히야, 이게 바로 이럴 때 쓰려고 만든 내 필살기라니까!” 그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투박한 ‘새총’이었다.

슬기는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런 장난감 같은 걸로 뭘 하겠다는 건가.

“내가 미끼가 될게. 슬기 씨는 저기 세 번째 놈부터.” 도윤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장난기 대신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뭐?” 슬기가 반문하기도 전에, 도윤은 재빨리 튀어나가 폐허의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이리 와 봐라, 못생긴 쥐돌이들아! 야, 이 변이된 털 뭉치들아!”

그의 도발에 변이된 쥐 세 마리가 일제히 도윤을 향해 달려들었다. 슬기는 망설일 틈도 없이 석궁을 쏘아 첫 번째 쥐의 옆구리를 맞췄다.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도윤은 기둥 사이를 잽싸게 이동하며 새총으로 쥐들의 눈을 노렸다. 퍽! 퍽! 그의 새총에서 날아간 작은 돌멩이가 정확히 쥐들의 눈을 맞췄고, 녀석들은 비틀거리며 잠시 주춤했다.

“슬기 씨! 지금이야!”

그의 외침에 슬기는 두 번째 쥐의 머리를 정확히 맞췄다. 세 번째 쥐는 눈을 맞고 잠시 방향을 잃은 사이, 도윤이 잔해 속에서 튀어나온 쇠 파이프를 집어 들어 녀석의 다리를 후려쳤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잠시 후, 폐허는 다시 고요해졌다. 슬기는 숨을 헐떡이며 도윤을 바라봤다. 그는 땀투성이가 된 얼굴로 씨익 웃고 있었다.

“봤죠? 저 새총, 생각보다 쓸만하다니까요?”

슬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도윤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침착함과 대범함에도 놀랐다.

“저, 슬기 씨? 괜찮아요?” 도윤이 다가오다가 발밑의 잔해에 걸려 비틀거렸다. 휘청거리는 그의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렸다.

“어어?”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도윤은 그대로 슬기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흙먼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향기가 훅 끼쳐왔다.

슬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도윤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졌다. “아… 아하하… 죄송합니다, 슬기 씨. 제가 원래 좀 몸치라서… 으음….”

그의 머리 위로 손바닥이 닿았다. 슬기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괜찮아. 안 다쳤으면 됐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도윤은 고개를 들어 슬기를 올려다봤다. 붉어진 얼굴에 그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장난기와는 다른, 따스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슬기 씨… 정말 괜찮아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슬기는 그의 눈을 피하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오면, 그때는 내가 너한테 제대로 된 총 하나 구해줄게.”

도윤은 씨익 웃었다. “와! 진짜요? 약속했어요! 그럼 이제 우리 진짜 동료 맞죠? 우리, 이 험한 세상 같이 살아남는 거예요!” 그의 목소리에는 변치 않는 낙천주의가 담겨 있었다.

슬기는 그를 바라봤다. 어쩌면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이 시끄럽고 어설프지만 묘하게 믿음직스러운 남자와 함께라면, 조금은 덜 외롭고, 조금은 더 살아갈 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아주 희미하고, 거의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그래. 일단은… 같이 가자.”

폐허의 마트 위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두 그림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한 명은 석궁을, 다른 한 명은 새총을 든 채로.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황폐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지만, 적어도 그날 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생존 조건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