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산 정상에 자리한 흑석 제단. 그곳은 인간의 피와 절규로 수천 년간 덧칠된 저주의 심장부였다. 거대한 검은 돌들이 원형으로 둘러쳐진 비무장 한가운데, 수십 길 높이의 검은 기둥 위에서 ‘그것’이 번뜩이고 있었다.
흑암의 거울.
세상의 운명을 결정할 저주받은 유물. 아니, 어쩌면 이미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
강휘는 가슴팍 깊숙이 차오르는 숨을 애써 갈무리했다. 끈적하고 역겨운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펼쳐졌던 사투의 잔해가, 아직도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선연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핏자국, 부서진 무기 조각, 그리고… 절단된 살점들이.
광기로 가득 찬 함성이 제단을 가득 메웠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관중들은 마치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이글거렸고, 강휘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과 같은 인간의 모습보다는, 차라리 악마의 그림자를 보았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서 있는가.’
강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파고드는 손톱의 날카로움이 옅은 고통과 함께 그의 정신을 붙들었다. 그는 이곳에 서고 싶지 않았다. 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축제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저 흑암의 거울이 불러올 것은 파멸뿐임을 알기에, 놈들의 손에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제단 전체를 뒤흔들었다.
“다음 대결! 저주받은 자, 흑영! 그리고… 비천문 잔당, 강휘!”
강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흑영. 그 이름만으로도 제단에 드리워진 어둠이 한층 더 깊어지는 듯했다. 그는 천하를 떠도는 악령이자, 살아있는 재앙이었다.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사악한 기운은 마치 지옥에서 갓 기어 나온 악마 같았다.
검은 장포를 걸친 흑영이 비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으나, 그 뒤에는 어둠이 질척하게 따라붙는 듯했다. 비정상적으로 긴 팔다리와, 그림자처럼 일렁이는 형체가 그의 존재를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얼굴은 깊은 후드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강휘는 그 안에 숨겨진 서늘하고 텅 빈 눈동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왔는가, 비천문의 찌꺼기.”
흑영의 목소리는 갈라진 쇠사슬이 부딪히는 듯했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메마른, 모든 생명을 증오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강휘는 저 목소리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의 비명을 듣는 것만 같았다.
“거울은… 네놈이 가질 수 없다.”
강휘는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흑영의 음성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흑영은 대답 대신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크르륵, 짐승이 목구멍을 긁는 듯한 소리가 제단에 퍼졌다.
“건방진 것. 네놈의 비천문은 이미 오래전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네놈 역시… 그 그림자의 일부분이 될 뿐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영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착시 현상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흑영의 몸에서 분리되어 강휘를 향해 뻗어 왔다.
쉬이이익!
검은 그림자 촉수가 강휘의 발목을 휘감았다. 차갑고 끈적한 기운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강휘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온몸의 근육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 그의 몸에서 생명력이 빨려 나가는 것 같았다.
‘이것은… 주술인가!’
강휘는 필사적으로 발악했다. 온몸의 내공을 끌어올려 그림자를 끊어내려 했지만, 그것은 형체가 없는 어둠이었다. 칼날도, 주먹도 통하지 않는 무형의 존재.
“하찮은 발버둥이군.”
흑영은 서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검은 안개처럼 휘감겨 들어왔다.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영혼마저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기운이었다. 강휘는 눈을 크게 떴다. 피가 거꾸로 솟는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크아악!”
그림자에 묶인 다리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고통은 단순한 육체의 아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었다. 그의 생명력이 마치 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강휘는 절감했다.
‘이대로는… 죽는다.’
피와 살점, 그리고 원념이 뒤섞인 듯한 제단의 공기가 강휘의 폐부를 짓눌렀다. 저 흑암의 거울이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절망에 빠지라고.
그러나 강휘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비천문의 마지막 후예였다. 그의 스승과 동료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금기의 힘이,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불꽃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늘 봉인해 두었던, 금기를 넘어선 힘이었다. 이 힘을 쓰면… 나 자신조차도 온전치 못할 터였다. 미쳐버리거나, 스스로가 괴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휘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검은 기운이 봉인을 깨고 폭발했다.
콰앙!
강휘의 몸에서 검은 오라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주위를 휘감고 있던 흑영의 그림자 촉수가 비명을 지르는 듯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피로 물든 새벽하늘처럼 섬뜩한 광채였다.
“네 이놈… 감히, 금기를…!”
흑영의 음성이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얼굴에서, 마치 생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경악이 비치는 듯했다.
강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을 흑영에게로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은 살육을 부르는 재앙이자,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저주였다.
“네놈이야말로… 이 제단에 드리워질 새로운 희생양이 될 것이다.”
강휘의 목소리 또한 낮고 거칠게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차가운 저주의 메아리였다. 흑영과 마주한 강휘의 모습은 이미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제단의 관중들은 경악에 찬 침묵에 빠졌다. 그들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이제는 순수한 공포에 질려 떨리고 있었다.
흑암의 거울이, 마치 두 그림자의 싸움을 비웃듯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