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오래된 숲의 부름
해 질 녘, 붉은빛이 비스듬히 교실 창문을 가로질러 책상 위로 쏟아졌다. 김아리는 수학 문제집의 미지수 x를 노려보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인데도 오늘은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웅성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칠판에 적힌 복잡한 공식도, 심지어 짝꿍 지수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마저도 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아리야, 집에 안 가? 벌써 종쳤어.”
지수가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그제야 아리는 종이 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하굣종이 울린 지 이미 십 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 어… 가야지.”
엉거주춤 가방을 메고 복도를 나섰다. 평소 같으면 시끌벅적했을 복도도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학교를 나서는 기분은 언제나 묘했다. 마치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고요함.
학교를 벗어나 익숙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낡은 상점 간판들과 허름한 주택들이 늘어선 길이었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매일같이 걷는 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저 하루가 너무 피곤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무언가가 그녀를 잡아끄는 듯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골목을 벗어나려던 찰나, 아리의 시선이 멈춘 곳은 낡은 철문이었다. ‘시민 공원’이라는 빛바랜 간판이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지만, 그곳을 공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작은 숲에 가까웠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낮에도 어둑한 그곳은,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도 ‘도깨비 숲’이라 불리며 기피 대상 1호였다. 십여 년 전, 어두컴컴한 숲 안쪽에서 발견된 오래된 돌탑 때문에 한때 ‘유적지’로 지정될 뻔했지만, 결국 별다른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결론이 나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진 곳이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 눈길도 주지 않았을 그곳에, 오늘은 왠지 모르게 이끌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어깨를 밀어 넣는 것처럼, 홀린 듯이 삐걱이는 철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녹슨 경첩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숲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 도시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없는 기묘한 침묵이 아리를 에워쌌다. 공기마저도 습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난 희미한 길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밑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덩굴들이 길을 뒤덮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아무도 오지 않은 걸까.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았지만, 아리는 멈출 수 없었다. 무언가 그녀를 계속 안으로, 더 안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시야가 탁 트이는 곳에 다다랐다. 나무들이 둥글게 비켜선 한가운데, 햇빛이 유일하게 닿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 중앙에는,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의 시선에서 잊힌 것처럼, 이끼로 뒤덮인 낡은 돌탑이 우뚝 서 있었다. 주변에는 조각난 석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 조각들 위로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리는 홀린 듯이 돌탑 앞으로 다가섰다. 높이 서 있는 돌탑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표면은 거칠었고, 군데군데 알 수 없는 문양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손을 뻗어 돌탑의 한 부분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이끼 사이로 손가락을 스치자, 섬세하게 조각된 문양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아리의 손이 닿은 돌탑의 문양에서, 눈부신 초록빛이 터져 나왔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생명체처럼, 빛은 돌탑을 휘감으며 위로 솟구쳤다. 아리는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초록빛은 그녀의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전율.
빛은 돌탑 주변을 맴돌다가, 아리의 몸을 통과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대 문명, 신비로운 주문, 그리고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들의 형상.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고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녀의 본능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듯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이게… 뭐야…?”
겨우 입술을 열었을 때, 빛은 절정에 달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초록빛은 사라졌고, 돌탑은 다시 이끼 낀 낡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리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방금 전의 그 경험이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의 몸 안에서, 심장의 박동과 함께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뜨겁고, 생동감 넘치는, 그러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기시감이 드는 힘.
그때, 저 멀리서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가 그녀에게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나의 아이…”*
환청일까? 아리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숲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나의 아이’라니?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돌탑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이제는 돌탑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저 낡은 유적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돌탑의 표면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들이, 이제는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듯 선명하게 빛나는 착각마저 들었다.
“내가… 뭘 한 거지…?”
그녀의 손끝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선명한 초록빛이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리는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단순한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아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을 빠져나왔다. 삐걱이는 철문을 닫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골목길로 들어서자,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차량 경적 소리, 이 모든 도시의 소음이 그녀를 현실로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어제의 김아리가 아니라는 것을. 손끝에서 스쳐 지나간 그 미지의 힘. 오래된 돌탑 속에서 깨어난 고대의 마법. 그 모든 것이 그녀의 평범한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은 알 수 없는 기대와 두려움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새로운 이야기가, 지금 막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