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저녁 공기가 이서아의 뺨을 스쳤다. 학원 창문 너머로 붉게 물들던 하늘은 어느새 짙푸른 남색으로 변해 있었고, 낮 동안 빽빽이 들어차 있던 수많은 불빛들이 하나둘 도시에 점멸하기 시작했다. 답답한 교재를 덮자마자 터져 나온 한숨은 마스크 안에서 축축하게 눅눅해졌다. 일 년 내내 이어지는 숨 막히는 일상에 지쳐갈 때마다 서아는 홀린 듯 도시 외곽의 ‘별이 잠든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오래전 폐쇄된 천문대 유적지를 작은 공원으로 재정비한 곳이었다. 도시의 중심가에서 꽤 떨어져 있어 찾는 이가 드물었고, 덕분에 서아는 그곳에서 짧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특히 공원 가장 안쪽에 숨겨진 작은 연못 옆, 이끼 낀 돌담이 휘감은 낡은 석탑은 서아만의 비밀 기지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곳은 마치 시간마저 잊은 듯 고요했고,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볼 때면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일 당장 제출해야 할 팀 과제 발표 준비가 엉망진창이었다. 발표 파트너인 윤정이는 늘 자기 할 일만 쏙 빼놓고 튀는 바람에 모든 부담은 서아의 몫이었다. 벌써 세 번째다.
“망했어, 진짜…”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어둠 속에 흩어졌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구불구불한 숲길을 따라 걷다, 이내 익숙한 석탑 앞에 섰다. 차가운 돌에 기대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렌즈 없는 안경을 쓴 것처럼 흐릿한 도시의 별빛은 언제나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곳만큼은 숨통을 트이게 했다.
“젠장, 정말 모르겠다고…”
들고 온 교과서와 참고서를 펼쳐보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새까맣게 엉켜버린 실타래 같았다. 중요한 개념은 단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고, 발표 자료는 백지에 가까웠다. 서아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에 주먹으로 바닥을 쿵 쳤다. 그때였다.
쿵, 하는 소리에 맞춰 석탑의 이끼 낀 돌담 사이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응?”
서아는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다시 보니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착각이었나 싶어 다시 책에 눈을 돌리려는 순간, 이번엔 훨씬 선명하고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마치 석탑 안에서 심장이 고동치는 것처럼, 빛은 깜빡이며 더욱 강해졌다. 서아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빛은 석탑의 가장 꼭대기에서 시작되어 돌담을 타고 내려오더니, 서아가 기대앉았던 그 부분에서 가장 환하게 타올랐다. 이끼와 넝쿨로 뒤덮여 알아보기 힘들었던 곳이, 마치 살아있는 숨을 내쉬는 듯했다. 빛이 걷히자, 이끼 속에 가려져 있던 오래된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별자리 같기도, 알 수 없는 기하학적 형태 같기도 한 복잡한 문양이었다.
서아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아닌, 마치 따뜻한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문양에 손바닥이 닿는 순간, 석탑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렬해졌고, 서아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랐다.
“흐읍!”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발밑의 땅이 사라지고, 몸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채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차가운 밤공기마저 뜨겁게 느껴졌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을 수 없었다. 석탑의 꼭대기, 오래된 별자리 문양 아래에서 푸른 빛줄기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 빛줄기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듯했고, 그 모든 별들이 서아를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언어와 기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오래된 역사, 잊힌 마법,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방대하고 압도적인 정보의 파도에 서아는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묘하게 평온하고 익숙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다시 찾아낸 기분이었다.
빛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서아의 몸도 중력의 법칙에 따라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거대한 에너지가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과 함께 흩어졌다.
눈을 깜빡였다. 주변은 다시 고요했다. 석탑은 여전히 이끼로 뒤덮인 채 낡고 오래된 모습 그대로였다. 푸른빛도, 떠오르던 몸도,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기묘한 정보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내가… 뭐 한 거지?”
서아는 떨리는 손으로 석탑의 문양을 더듬었다. 이제는 차갑고 거친 돌의 감촉만 느껴질 뿐이었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을까?
그때, 손끝에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놀라서 손바닥을 뒤집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아주 작고 섬세한 푸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방금 전 석탑에서 보았던 그 알 수 없는 별자리 같기도 하고 기하학적 무늬 같기도 한 문양이었다.
마치 피부에 스며든 문신처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서아는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그녀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온기는 왠지 모르게 안심되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어둠과 고요함 속에, 서아만이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새겨진 푸른 문양은 그녀가 겪은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석탑은 다시 잠든 듯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아는 알 수 있었다. 석탑은 더 이상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은 단순한 꿈의 흔적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잊혔던, 고대의 힘이 그녀의 손에서 다시 깨어난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그녀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서아의 평범했던 일상은 그날 밤,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버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