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민준은 익숙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낮 동안 짊어졌던 도시의 소음과 피로는 그의 어깨 위에서 거대한 바위처럼 짓눌렸고, 조용히 눈을 감으려 애썼다. 15층 높이의 이 아파트가 주는 특유의 고요함은 종종 그를 안심시켰다. 창밖으로는 희미하게 불빛을 뿜어내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지만, 그의 방 안은 어둠과 정적만이 가득했다. 적막은 너무 완벽해서, 마치 진공상태에 갇힌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툭.’
아주 작고, 건조한 소리가 났다. 민준은 눈을 깜빡였다. 거실에서 들린 소리였다. 처음에는 그저 건물이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겠거니 생각했다. 이 정도 높이의 건물이라면, 아주 미세한 지반 움직임에도 가구가 삐걱거리거나 벽에서 소리가 날 수 있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소리가 들렸다.
‘툭. 툭.’
이번에는 좀 더 규칙적이었다. 마치 작은 공이 벽에 부딪혔다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 민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양이도 키우지 않고, 심지어 애완동물 자체를 들이지 않았다. 혹시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나는 소음이 전달되는 건가 싶었지만, 소리의 질감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까웠다.
그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거실은 달빛에 희미하게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파, 테이블, 텔레비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특별히 떨어진 물건도, 흐트러진 것도 없었다. 민준은 천천히 거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멈춘 곳은 벽이었다. 서재로 통하는 문 바로 옆의 벽.
“여긴가?”
그가 벽에 귀를 대자, 소리가 멎었다. 완벽한 정적. 민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피곤하긴 피곤한가 보네.” 그는 다시 침실로 돌아가려 했다.
바로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그 소리는 명백히 스위치가 눌리는 소리였다. 그것도 방금 자신이 지나온 서재 안에서. 서재 문은 닫혀 있었다. 그리고 스위치는 분명히 꺼져 있었을 터였다. 민준은 돌아섰다. 서재 문틈 아래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방 안의 불이 켜진 것이다.
“야, 김민준. 네가 건망증이 심한 건 알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그는 애써 스스로를 달래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낮에 서재에서 나오면서 불을 끄는 것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불을 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분명히 ‘지금 막’ 스위치가 눌리는 소리였다.
그는 서서히 서재 문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손잡이를 잡으려던 순간, 빛이 깜빡였다. 방 안의 불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마치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젠장.’
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용기를 내어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흐읍!”
문이 열리는 순간, 서재 안은 암흑이었다. 불은 완벽히 꺼져 있었다. 방금까지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희미한 불빛조차 없었다. 민준은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좁은 서재 안을 비추자, 수많은 책들과 서류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자신이 정리했던 그대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누구… 없어요?” 민준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그의 질문은 텅 빈 방 안에서 메아리쳤다.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없었다. 마치 자신의 질문 자체가 허공으로 증발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천천히 서재 안으로 발을 들였다. 플래시가 비추는 곳마다 그림자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자신이 어제 작업하던 서류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이 마시다 남긴 컵이 놓여 있었다.
‘끼이이익…’
갑자기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문을 미는 것처럼, 서서히 닫혔던 것이다.
“이게… 무슨…”
그는 도어락을 다시 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손잡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돌리려 해도 단단히 잠겨버린 듯했다. 민준은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였다. “이봐! 이거 열어! 누가 장난치는 거야?” 그는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이 작은 방 안에 갇혀 공포를 증폭시킬 뿐이었다.
그때였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컵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준의 눈앞에서. 마치 투명한 손이 컵을 잡고 미는 것처럼, 컵은 책상 모서리를 향해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민준은 뒷걸음질 쳤다. 그의 등은 어느새 차가운 벽에 닿아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울렸다. 그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나 명백했다. 착각도, 피로에 의한 환각도 아니었다. 그의 아파트, 그의 서재에서, 물리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더욱 소름 끼치는 일이 벌어졌다.
산산조각 난 컵 조각들이 바닥에서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유리 파편들이 중력을 거스르며 공중에 부유했다. 마치 무형의 존재가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플래시 불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유리 조각들은 섬뜩한 유성처럼 민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공중에 떠 있는 유리 조각들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 너머, 텅 비어 보이는 공간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공기의 일렁임 같기도 하고, 투명한 막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한, 불분명한 형태. 그것은 마치… 눈동자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누구야?” 민준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응답은 없었다. 대신, 공중에 떠 있던 유리 파편 중 가장 큰 조각이 천천히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것은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운 각도로, 정확히 그의 눈을 겨냥하고 있었다.
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더 이상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악몽이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뺨에 스치는 차가운 바람, 날카로운 파편이 그의 피부를 긁고 지나가는 듯한 따끔한 감각은,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아파트 현관에서 ‘철컥’ 하는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준 씨, 안에 계세요?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아서요.”
그것은 이웃집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민준은 서재 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유리 파편이 서서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공기의 일렁임이 사라지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아파트에, 아니, 이 서재 안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존재에게 완벽히 갇혀 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