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심우주, 검은 벨벳 위에 수놓인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별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적막 속을 가르며 우주선 ‘오로라 호’가 유영하고 있었다. 미개척 은하 변방을 탐사하는 임무는 지루함과 경외감 사이를 오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함교의 푸른빛 조명 아래, 이수아 함장은 컵에 담긴 식용 젤리를 무심하게 휘저었다. 화면 가득한 별들의 향연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었다.
“함장님, 벌써 3개월째 이상 무네요.”
부함장 박준혁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늘 그렇듯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이상 무가 가장 좋은 상태 아니던가, 박 부함장.”
수아는 픽 웃었지만, 이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도… 너무 조용해서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곳일수록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지기 마련이죠.”
그때였다.
지잉-!
조용하던 함교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메인 화면에 붉은 경고창이 번쩍였다.
“에너지 스파이크 감지! 미확인 고에너지 반응!”
과학 담당 김현우 박사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변수’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위치 특정해!” 수아의 목소리는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
“좌표 1-3-7-델타, 거리 약 5천 킬로미터! 고정되어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아요!”
현우는 재빨리 추가 분석을 시도했다.
“물질 구성은? 규모는?”
“판독 불가입니다, 함장님! 스캔 파장이 모조리 흡수되거나 왜곡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밀도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이런 물질은 본 적이 없어요!”
화면에 정체불명의 존재가 흐릿하게 나타났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한유진, 이제 막 실전 배치된 신참 통신병은 숨을 꼴깍 삼켰다. 그녀의 눈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것은… 저 검은 우주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도 모든 빛을 집어삼킬 것 같은 어둠이었다.
“접근한다. 거리는?” 수아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
“함장님! 위험합니다! 어떤 유형의 존재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준혁이 즉시 반대했다. 그의 임무는 언제나 승무원들의 안전이었다.
“박 부함장,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잊었나? 미지의 것을 탐사하고, 인류의 지평을 넓히는 것. 저것은 우리가 찾던 ‘미지’ 그 자체일지도 몰라.”
수아의 눈빛에는 확고한 탐사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최대 방어막 가동, 탐사 드론 선행 배치. 전 함선 전투 태세 준비! 속도 최저로 유지하고 접근한다!”
‘오로라 호’는 조심스럽게 미지의 존재를 향해 나아갔다. 수천 킬로미터가 수백, 수십 킬로미터로 줄어들었다. 탐사 드론이 보내오는 영상이 메인 화면을 채웠다.
“세상에…” 현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유진 역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거대한 검은색 오벨리스크였다. 길이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기하학적인 구조물. 완벽하게 매끄러운 표면은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했으나, 동시에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은은한 자주색 빛줄기가 표면을 따라 몽환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문양처럼.
마치… 오래된 신전의 문이 우주 한가운데 떠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인공적인 구조물도, 자연적인 현상도 아니었다.
“고대 문명… 유물입니다. 틀림없어요!” 현우가 흥분해서 말했다. “이런 완벽한 비례와 구조는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이 에너지 패턴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수만 년, 아니 수억 년 전에 만들어졌을지도 몰라요!”
오벨리스크는 웅장한 침묵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유진, 장거리 스캔으로 내부 구조 분석해 봐.” 수아의 지시가 떨어졌다.
“네, 함장님!”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콘솔을 조작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밀려왔다. 화면 속의 오벨리스크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녀가 분석 프로그램을 실행하자, 오벨리스크의 표면에서 자주색 빛이 더욱 강렬하게 번뜩였다. 동시에 유진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환영… 같은 것이었다.
마치 수억 년 전의 기억이 강제로 주입되는 듯한 아찔한 통증에 유진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유진? 괜찮나?” 준혁이 그녀를 돌아봤다.
“네… 네, 괜찮습니다. 그저… 어지러워서요.”
하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마치 오벨리스크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자신만을.
그때, 오벨리스크의 표면에서 자주색 빛이 한데 모여들더니,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에너지 파동이 터져 나왔다.
‘오로라 호’는 거대한 충격파에 휘청거렸다. 선체 곳곳에서 비상등이 깜빡이고 경고음이 난무했다.
“함장님! 방어막 50% 손상! 에너지 충격파입니다!” 준혁이 소리쳤다.
“현우 박사, 분석 결과는?!” 수아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아직… 아직… 아니, 잠깐만요! 이 파동은… 공격이 아닙니다! 이건… ‘개방’입니다! 유물 내부의 봉인이 해제되고 있어요!”
현우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오벨리스크의 중앙, 완벽하게 매끄럽던 표면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문이 열리듯, 그 틈새에서 순도 높은 자주색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눈부신 빛의 조각들이 뭉치더니… 하나의 형상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벨리스크의 빛은 다른 어떤 빛보다 강렬하게 그녀의 눈동자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심장은… 폭발할 것 같았다.
빛의 형상은 점점 선명해졌다. 그것은… 작은 크기의, 수정처럼 투명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구체였다. 마치 손 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크기.
그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유진의 몸을 관통하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수억 년의 시간이 흘러, 봉인된 신비가 그녀를 선택한 순간이었다.
“저건…” 현우가 말을 잇지 못했다.
수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준혁은 무의식적으로 무기 콘솔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유진은… 마치 홀린 듯이 함교를 나섰다. 온몸이 이끌리는 대로, 오직 그 빛을 향해.
“유진! 어딜 가는 거야!” 준혁이 뒤늦게 외쳤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오벨리스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자주색 빛이 ‘오로라 호’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유진이 빛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오벨리스크와 같은 자주색 빛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녀의 온몸을 감싼 빛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의 힘이자, 새로운 시작의 서막이었다.
그녀의 심장에서, 그리고 그녀의 영혼에서, 무엇인가 깨어나고 있었다.
전설이 잠든 유물 속에서… 마법소녀의 운명이, 지금,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우주를 뒤흔들 거대한 변화의 서막이, 그렇게 정체불명의 오벨리스크 앞에서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