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나 마법 학원은 신성했다. 아니, 적어도 모두 그렇게 믿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웅장한 돌 건물들은 시간의 위엄을 웅변했고,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첨탑에서는 밤마다 은은한 마력이 흘러나와 학원 전체를 감쌌다. 재능 있는 마법사 지망생들이 꿈을 안고 모여드는 곳, 세계의 마법을 선도하는 지성의 전당. 그곳이 바로 내가 몸담고 있는 아르카나였다.
나는 이안, 이곳 아르카나의 2학년 학생이다. 뛰어난 마법 재능을 가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지만, 내게는 한 가지 고질적인 병이 있었다. 끈질긴 호기심. 그것은 금지된 문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끊임없이 탐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르카나에는 유독 그런 금지된 것들이 많았다. 특히, ‘심연의 서고’라고 불리는 지하 최하층. 그곳은 개원 이래 모든 학생은 물론, 일반 교수진조차 발을 들일 수 없는 봉인된 영역이었다.
수년 전부터 밤마다 알 수 없는 꿈을 꾸었다. 차갑고 축축한 지하 통로를 걷다가 끔찍한 비명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는 꿈. 처음엔 단순한 악몽이라 생각했지만, 학원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필사본에 그 비명의 기록이 아주 희미하게 언급된 것을 보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필사본은 아르카나 개원 초기의 기록이었고, 어떤 이름 모를 학자가 ‘심연 아래에서 들려오는 저주받은 소리’에 대해 짧게 기술해 놓았다. 그날 이후, 내 호기심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안, 대체 또 무슨 꿍꿍이야? 그 녀석의 눈빛은 딱 봐도 사고 칠 생각 가득이잖아.”
가장 친한 친구인 릴리아가 나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그녀는 섬세한 성격이지만 눈치 하나는 귀신 같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과제 때문에 머리가 좀 아파서.”
나는 애써 웃었지만, 릴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나를 꿰뚫어 볼 듯 응시했다.
“거짓말하지 마. 너 요 며칠 밤마다 서고에서 수상한 책들 뒤적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심연의 서고 말하는 거 아니지?”
릴리아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함께 질책이 섞여 있었다. 심연의 서고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입에 담는 것조차 불길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괜찮아. 그냥 좀 궁금할 뿐이야. 아르카나의 모든 역사서에 왜 개원 초기 십 년간의 기록이 그렇게 듬성듬성한지, 그 답이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답을 찾아봤자 뭐가 남는데? 금지된 건 이유가 있는 거야, 이안.”
릴리아의 경고에도 내 안의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미리 찾아둔 지하 비밀 통로 지도를 들고, 어둠이 깊어진 학원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한밤중의 아르카나는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마법의 빛은 모두 잠들었고, 고요함 속에 숨죽인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져 나를 쫓는 듯했다. 복도를 지나 학원 본관의 가장 오래된 구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학생들의 출입이 금지된 낡은 강의실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중 한 강의실 지하에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낡은 탁자를 치우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의 마법진이 드러났다. 지도를 따라 마법진에 몇 가지 마력을 주입하자, 바닥의 돌이 천천히 옆으로 미끄러지며 어두컴컴한 구멍이 나타났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곰팡내, 그리고 알 수 없는 쇠 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나선형 계단을 한참 동안 내려갔다. 계단의 끝은 좁고 긴 복도로 이어졌다. 복도 양쪽에는 굳게 닫힌 돌문들이 띄엄띄엄 박혀 있었다. 문들에는 고대 마법 문자로 된 봉인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문양들은 기이하게도 섬뜩한 기운을 풍겼다. 나의 발소리만이 고요한 어둠 속에서 울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복도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철문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문 위에는 핏빛으로 변색된 듯한 마법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시간의 굴레를 묶는 자, 영겁의 잠에 들리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분명 이곳은 평범한 서고가 아니었다. 나는 손바닥을 철문에 대고 조심스럽게 마력을 흘려보냈다. 고대 마법 문자에 반응하듯, 철문이 서서히 흔들리더니 삐걱거리는 굉음을 내며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안에서는 상상치도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곳은 서고가 아니었다. 거대한 원형 공간의 중앙에는 섬뜩하게 빛나는 흑요석 제단이 서 있었고, 제단 위에는 기묘한 모양의 수정 구슬이 얹혀 있었다. 구슬 주변으로는 흐릿한 빛의 실타래들이 복잡하게 얽혀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모습이었다.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 마법적인 압력은 내 영혼까지 짓누르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제단 주변을 둘러싼 벽화였다.
벽화는 아르카나 개원 초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다. 초라하지만 열정적인 모습의 학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법을 연구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대신, 벽화 속에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손목과 발목에 마법 사슬을 묶인 채, 흑요석 제단 주변에서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흐릿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수정 구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독하는 자들은 바로 아르카나의 창립자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냉정하고 차가웠다. 눈에는 오직 마법적인 탐욕만이 빛나고 있었다.
“이건… 대체…”
나는 무릎을 꿇었다. 충격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것이 아르카나의 숨겨진 진실이란 말인가? 세계 최고의 마법 학원이, 이렇게 잔혹한 희생 위에서 세워졌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흑요석 제단의 수정 구슬에서 섬광이 터져 나오듯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공간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화 속의 마법 사슬이 빛나더니, 고통받는 사람들의 형상이 벽화에서 뛰쳐나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수정 구슬에서 뻗어 나온 빛의 실타래 하나가 내 몸을 휘감았다.
온몸의 세포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낯선 마법 주문들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혼란 속에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여전히 그 지하 공간에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랐다. 흑요석 제단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훨씬 더 생생하고, 훨씬 더 지독했다. 마치 시간이 되감아진 듯, 벽화 속의 고통받는 사람들이 제단 주변에 실제로 묶여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공포와 체념으로 가득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수정 구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내가 벽화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아니, 훨씬 더 현실적이고 잔혹했다.
“시간의 재료가 되어 아르카나의 영광을 밝힐지어다!”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학원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대마법사 엘리온이었다. 그는 내가 아는 역사 속의 인물보다 훨씬 젊고, 그의 얼굴에는 소름 끼치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옆에는 몇몇 학자들이 차가운 눈으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내가 과거로, 그것도 아르카나의 가장 어두운 개원 시점으로 시간 이동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눈앞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인간들이었다. 그들의 절규는 마법 에너지로 변환되어 수정 구슬로 빨려 들어갔다. 그 구슬은 단순한 마법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을 왜곡하고 마력을 축적하는 거대한 ‘시간 에너지 저장소’였다. 아르카나의 번영이, 바로 이 끔찍한 시간 강탈과 생명 착취 위에서 이룩된 것이었다.
“더 많은 시간을 끌어와라! 고통은 마력을 농축시킨다! 그래야 우리 아르카나가 영원히 빛날 수 있다!”
엘리온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눈에는 인간적인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마법적인 성공과 학원의 영광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끔찍한 환상에 빠진 듯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력이 고갈되어가는 사람들의 몸이 서서히 말라가는 모습, 그들의 생명 에너지가 마치 연료처럼 소모되는 모습을. 그리고 깨달았다. 아르카나의 찬란한 마법력은, 바로 이 과거의 희생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시간을 재료’로 삼아 공급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학원 자체가 거대한 마법 장치이자, 동시에 잔혹한 영원한 감옥이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이 역겨운 진실, 이 끔찍한 금기. 아르카나의 영광은 피와 절규 위에 세워진 거짓된 탑이었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엘리온과 학자들은 마법 의식에 몰두해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였다. 이곳에 더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돌아가지? 아니, 돌아간다 한들 이 끔찍한 진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본능적으로 제단 위의 수정 구슬에 손을 뻗었다. 찰나의 순간, 구슬 속에서 나를 향해 뻗어 나오는 빛의 실타래가 느껴졌다. 나는 그 빛을 붙잡고, 온몸의 마력을 끌어모아 간절히 빌었다. ‘돌아가게 해줘! 제발!’
다시 한번 온 세상이 뒤틀리고 빛으로 잠식되었다. 비명과 함께 시공간이 붕괴하는 듯한 아득한 혼란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철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심연의 서고, 아니, 심연의 제단이라 불려야 할 그곳은 다시금 어둠과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모든 것은 내가 떠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나의 눈은 그 끔찍한 진실을 보았고, 나의 영혼은 그 비명 소리에 찢겼다.
나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왔다. 낡은 강의실, 그리고 익숙한 학원 복도. 어슴푸레 동이 트기 시작하는 창밖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아르카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마법 학원이었다. 학생들은 하나둘 깨어나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거짓으로 보였다. 학원의 웅장한 건물들은 끔찍한 진실을 가리기 위한 거대한 장막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아르카나의 모든 영광과 번영이 수백 년 전, 그 지하 제단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시간과 생명 위에서 피어났다는 것을. 그리고 그 끔찍한 금기가 여전히 학원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나 역시 그 금기의 공범이 된 듯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모든 학생들처럼, 이 화려한 거짓 속에 눈감고 살아가야 할까? 밝힌다 한들, 누가 믿어줄까? 이 거대한 학원의 뿌리 깊은 어둠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을까?
아르카나의 아침 햇살이 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름답지만, 내게는 한없이 차가운 빛이었다. 나는 숨죽여 그 빛을 바라봤다. 나의 시간은 되돌아왔지만, 나의 세계는 영원히 바뀌어 버렸다. 이제 나는, 아르카나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이 끔찍한 금기는 내 안에서 영원히 메아리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진실을 어떻게든 세상에 드러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영혼은 영원히 심연의 비명 속에 갇혀버릴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