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속의 집
햇빛은 죽은 도시 위로 형편없이 흩어졌다. 잿빛 하늘은 핏기 없는 얼굴처럼 무표정했고, 저 멀리 병풍처럼 늘어선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아 비현실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훈은 23층 아파트의 창가에 서서 익숙한 풍경을 응시했다. 몇 년째 이어지는 이 지독한 고요 속에서, 살아남은 자는 자신뿐인 것 같았다. 적어도 이 구역에서는.
냉난방이 끊긴 지 오래인 아파트는 바깥 기온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낮에는 후덥지근했고, 밤에는 싸늘했다. 오늘처럼 구름 낀 날은 해가 지기 전부터 한기가 돌았다. 지훈은 낡은 야전상의 깃을 바짝 세웠다. 비축해 둔 통조림 수프를 데워 먹고, 빗물 정수기로 걸러낸 물을 마셨다. 매일 반복되는 생존 의식이었다.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자, 거실 중앙에 놓인 캠핑용 가스등을 켰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주황색 불꽃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빛은 그림자를 잔뜩 늘어뜨리며, 낯익은 공간을 낯설게 왜곡했다. 지훈은 낡은 소파에 몸을 파묻고 귀를 기울였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바람 소리뿐이었다. 유리가 깨진 창틀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
그때였다. 툭.
작은 소리가 정적을 깼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소리는 부엌 쪽에서 났다.
“뭐지?”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답해줄 이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가스등의 불빛이 지훈의 움직임에 따라 불안하게 흔들렸다. 식탁 위에는 어제 먹고 남은 통조림 캔과 낡은 컵이 놓여 있었다.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착각인가.”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 다시 한번 툭.
이번에는 훨씬 명확하게 들렸다.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는 소리.
지훈은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컵은 식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깨진 파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는, 깨진 유리가 흩어져 있는 것처럼 투명한 잔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누구야?”
목소리가 떨렸다. 아파트 안에는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 건물을 샅샅이 뒤져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었다. 수없이, 수십 번이나.
손전등을 들고 부엌 구석구석을 비췄다. 낡은 찬장 안, 개수대 아래, 냉장고 뒤편.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 외에는.
그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깨진 유리 같은 잔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날 밤, 지훈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낡은 아파트가 삐걱거리는 소리, 바람이 유리창을 흔드는 소리 하나하나가 위협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지훈은 옥상에서 빗물을 받아 내려오던 중이었다. 낡은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고 내려오는데, 복도 끝의 비상구 문이 저절로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심장이 철렁했다.
“바람인가….”
중얼거렸지만, 닫힌 문은 바람에 흔들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누군가 강하게 밀어 닫은 것처럼 육중하고 단호했다.
그는 낡은 도끼를 움켜쥐었다. 쇠로 된 문고리를 잡는 순간, 끔찍한 냉기가 손바닥을 감쌌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얼음장 같았다. 화들짝 손을 떼자, 문은 스르륵, 하고 아주 천천히 열렸다.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지훈은 문을 닫고 다시 아파트로 향했다.
그때부터였다. 기이한 현상들이 일상처럼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그는 문을 잠그고 있었지만, 밤중에 침실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눈을 뜨면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너머 복도는 알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때로는 거실에 놓아둔 물건들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빈 통조림 캔이 데구르르 굴러가거나, 읽고 있던 책이 펼쳐진 채 바닥으로 떨어지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눈을 비비며 다시 주워 놓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어차피 다시 움직일 테니까.
가장 지독했던 것은 소리였다.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접시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텅 빈 화장실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
벽을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웅웅거리는 울림.
마치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심장이라도 된 양, 깊은 곳에서부터 낮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 진동은 발바닥을 통해 몸속으로 스며들어 신경을 갉아먹는 듯했다.
지훈은 점점 잠을 줄였다. 혹시라도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웠다. 먹는 것도 줄었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었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가스등 불빛 아래에서 낡은 도끼를 든 채 밤을 지새우곤 했다.
어느 날 밤.
웅웅거리는 진동이 유난히 심했다. 마치 아파트 자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지훈은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으려던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몰려왔다.
“으윽!”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뒤를 돌아보니, 닫혀 있던 침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찰칵,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낡은 카메라의 셔터 소리 같았다.
동시에, 침실 안에서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번쩍, 번쩍.
빛은 점멸하며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그리고 지훈은 그 순간을 똑똑히 보았다.
침실 한가운데에, 자신의 침대가 떠 있었다.
공중에, 아무것도 받치지 않은 채, 침대 시트가 마치 거대한 폐처럼 부풀어 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 움직임에 맞춰 침대에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엇보다, 침대 위에, 누군가 있었다.
사람의 형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검은색이었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 칠흑 같은 형체. 그 형체는 지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고개가 없었다. 오직 검은 덩어리였다. 그 덩어리에서, 붉은 빛이 일렁이는 두 개의 점이 지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 아파트와 함께 있었다.
“아아아아악!”
지훈은 비명을 질렀다. 목이 찢어지는 듯한 절규였다. 그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거실 창문으로 달려갔다. 쇠약해진 몸으로 창문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바람이 폐 속으로 들이닥쳤다.
뛰어내려야 할까. 아니,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그는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23층. 까마득한 높이였다.
그때,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메아리가 뒤섞인 듯한, 하지만 분명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아파트 전체가 동시에 말하는 듯한, 공간을 뒤틀어버리는 음성이었다.
동시에, 창문 밖으로 보였던 도시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잿빛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멀리 있던 건물들은 녹아내리는 촛농처럼 형태를 잃었다. 아파트 벽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균열들이 번개처럼 벽을 타고 솟아올랐다.
지훈의 발밑에서 바닥이 진동했다. 거실의 가구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산산조각 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가지 마….”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강렬해졌다.
아파트가 숨을 쉬고 있었다. 거대한,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그리고 그 안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지훈을 응시하고 있었다. 벽의 균열 사이에서, 천장의 구멍 속에서, 바닥의 틈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눈들이.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다.
아파트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아파트는 그를 원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떨어뜨렸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지옥 같은 아우성 속에 묻혔다.
“나는… 살아남을 거야…!”
지훈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23층 높이에서 추락하는 대신, 옆 건물 옥상으로 이어지는 낡은 비상 탈출용 강철 케이블을 붙잡았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손을 덮쳤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아파트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먹이를 놓치기 싫다는 듯이.
“돌아와…!”
수백, 수천 개의 목소리가 뒤섞인 절규가 그의 등 뒤를 때렸다.
지훈은 필사적으로 케이블을 타고 건너편 건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피와 살이 뜯겨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낡은 아파트의 23층 창문에서는, 수많은 검은 형체들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는 천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괴물이 목 놓아 울부짖는 것처럼, 굉음과 함께 콘크리트와 철골이 무너져 내렸다.
지훈은 건너편 건물 옥상 바닥으로 겨우 착지했다. 온몸의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봤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아파트의 잔해였다.
그리고 그 잔해 속에서, 마지막으로.
거대한 틈 사이로, 붉게 일렁이는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아파트는 죽었지만, 그 안의 무언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훈은 알았다.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이 세상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무언가가 솟아나오고, 텅 빈 공간에서 알 수 없는 존재가 숨 쉬는 곳.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끝없는 고통만이 기다릴 뿐이라는 것을.
그는 다시 일어섰다. 새로운 위험을 향해. 죽음의 도시 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