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녹슨 철조망이 찢어진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 너머로 무너진 아파트 단지가 잿빛 하늘 아래 스산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한때 활기 넘쳤을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김현수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운동화 소리가 적막한 골목에 날카롭게 울렸다. 손에 쥔 쇠지렛대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벌써 몇 달째, 이 지렛대 하나와 등에 멘 배낭이 그의 전부였다.

“젠장, 또 꽝인가.”

현수는 중얼거리며 텅 빈 상점을 뒤적였다. 쥐 한 마리조차 얼씬거리지 않는 곳이었다. 먼지 쌓인 선반에는 부패한 음식물 흔적만 가득했다. 절망은 이제 익숙한 감정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미 깨끗한 것들을 모조리 휩쓸어 갔거나, 아니면 이 도시의 미친 괴물들에게 뼈도 못 추리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창고 문을 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플래시를 비추자 거대한 그림자가 흔들렸다. 놈이었다. 벽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던 감염자 하나가 플래시 불빛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살점, 움푹 들어간 눈窩(눈窩)에서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놈의 목에서 찢어지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현수는 숨을 들이켜고 쇠지렛대를 고쳐 잡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놈이 한 발짝 내딛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놈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예측 불가능했다. 현수는 재빨리 몸을 날려 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퍽! 썩은 고기가 터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이 비틀거렸다. 현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의 머리를 향해 쇠지렛대를 내리찍었다. 콰직!

감염자가 맥없이 쓰러졌다. 축축한 바닥에 붉고 검은 피가 번졌다. 현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몇 번을 겪었지만, 매번 익숙해지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는 놈의 시체를 발로 밀쳐내고 다시 창고 안을 살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구석에 처박힌 박스 하나. 그 위에는 ‘비상식량’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현수는 조심스럽게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통조림 몇 개와 비상용 건빵이 들어 있었다. 썩지 않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현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웃음이었다.

“젠장… 이걸 찾으려고 몇 시간 동안 죽을 뻔했네.”

그는 통조림 하나를 따서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 짭짤하고 비릿한 맛이 혀에 닿자 온몸의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맛’다운 맛인지 모르겠다. 배고픔을 면하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식사를 마친 현수는 다시 길을 나섰다. 배낭은 아까보다 조금 더 묵직해졌다. 그는 목표 없이 움직였다. 그저 더 안전하고, 더 풍요로운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그러나 며칠째 특별한 것은 없었다. 늘 그렇듯, 무너진 건물, 텅 빈 도로, 그리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괴물들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폐허가 된 주택가 골목을 지나던 현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아니라, 훨씬 작고, 불규칙한 소리. 마치… 무전기 소리 같았다.

현수는 발걸음을 멈췄다. 바람 소리인가? 아니면 환청? 하지만 다시 한번, 지직거리는 소리 사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현수는 폐허가 된 건물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리는 저 멀리, 시내 중심부에서 나는 듯했다.

그는 망설였다. 무전기 신호는 곧 살아있는 사람의 존재를 의미했다. 하지만 동시에, 괴물들의 소굴로 향하는 초대장이 될 수도 있었다. 이기적이고, 광포한 인간들이 아직 남아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전에 몇 번 사람을 만났지만, 그 만남은 좋은 결말을 맺지 못했다. 늘 빼앗거나, 빼앗기거나, 아니면 서로를 경계하다가 헤어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현수의 발걸음은 이미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친 몸보다 더 지쳐버린 외로움이 그를 이끌었다.

“젠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는 중얼거리며 폐허 속으로 들어갔다.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이제는 어렴풋하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재 위치… 동쪽으로… 위험… 반복한다…”

경고음이었다. 현수는 즉시 몸을 낮췄다. 무너진 벽 뒤에 숨어 조심스럽게 전방을 살폈다. 소리가 나는 곳은 허물어진 백화점 건물이었다. 창문들은 깨져 있고, 벽에는 총알 자국 같은 것이 선명했다. 현수는 천천히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먼지와 잔해만 가득했다. 하지만 1층 중앙, 무너진 에스컬레이터 옆에 간이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통나무와 박스, 부서진 가구들로 만든 허술한 방벽이었다.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누구… 없습니까?”

현수가 작게 속삭였다. 반응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더 크게 불렀다.

“사람 있습니까?!”

그 순간, 바리케이드 틈새로 총구가 쑥 튀어나왔다. 낡은 소총이었다. 현수는 재빨리 두 손을 들었다.

“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길을 잃었어요!”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기를 버려.”

현수는 쇠지렛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쨍그랑!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그리고 바리케이드가 천천히 열리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중년의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현수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자였다. 둘 다 남루한 옷차림이었지만, 총과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특히 여자의 눈은 현수를 꿰뚫어 볼 듯 날카로웠다.

“누구냐.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남자가 낮게 물었다.

“그냥… 버려진 건물들을 뒤지다가 소리를 듣고 왔습니다. 혼자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현수는 그들의 대화가 불안했다.

“저 자식… 놈들 끌고 온 거 아니야?”
“아직은 두고 봐. 무장도 허술하고, 그렇게 위험해 보이진 않아.”

남자는 현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총구를 내렸다.

“이름이 뭐지?”
“김현수입니다.”
“여기는… 생존자 캠프다. 이름만 그렇다는 거고. 일단 들어와라. 밖은 위험하다.”

현수는 망설였다. 캠프라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단어였다. 하지만 동시에 불신감도 들었다. 언제나 위협은 괴물들만이 아니었으니까.

“뭘 그렇게 망설여? 안으로 들어오든가, 아니면 여기서 죽든가 선택해.” 여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현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고, 몇 개의 간이 침상과 장비들이 놓여 있었다. 라디오가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동 중에 들은 무전 보고인가요?” 현수가 물었다.

“그래. 이 근처에 큰 놈들이 몰려온다는 소리야.”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 박 팀장이라고 불러. 이쪽은 김소희. 감시 담당이지.”

소희는 현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감시 담당이라기보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쏴 죽이는 담당이겠지.” 현수가 피식 웃었다.

소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닥쳐. 우리가 너 같은 떠돌이를 무작정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요. 단지… 저도 당신들만큼이나 세상을 믿지 못해서요.” 현수의 눈빛에 씁쓸함이 스쳤다.

그때, 갑자기 라디오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삑- 삑- 삑- 긴급 신호였다.
박 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젠장, 예상보다 빨라.”

그 순간, 바깥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현수가 몸을 움찔했다.

“무슨 소리죠?”

“놈들이야! 백화점 후문 쪽인가?!” 소희가 즉시 총을 들었다.

박 팀장이 급히 장비를 챙기며 외쳤다. “현수 씨! 당신이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쓸모가 있다는 걸 증명해 봐! 뒤를 부탁한다!”

그들이 바리케이드 너머로 달려 나갔다. 현수는 잠시 망설였다. 도망칠 수도 있었다. 아니, 도망치는 것이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저들은 낯선 사람들이고, 이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스스로만을 믿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혼자 먹었던 통조림의 짭짤한 맛, 무전기에서 들려오던 희미한 목소리. 그리고 방금까지 자신을 경계하던 소희의 날카로운 눈빛.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익숙했던 고독과는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쿵! 쿵! 쿵!
후문 쪽에서 놈들이 벽을 부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는 쇠지렛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차가웠던 쇠붙이가 손에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젠장…!”

현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박 팀장과 소희가 나간 쪽을 향해 달렸다.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곳, 어둠 속에서 붉은 눈들이 번뜩이는 곳, 그는 그곳으로 향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희미한 감각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아주 잠시나마, 그는 이 싸움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위안이었고, 곧이어 닥쳐올 지옥 같은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존의 싸움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