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는 오늘도 키보드를 두드렸다. 닳아빠진 키보드 위로 그의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서른둘. 직장생활 10년 차. 남는 건 통장 잔고의 숫자와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뿐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재개발 지역의 낡은 아파트 사진이 붙어 있었고, 그 옆에는 ‘빚 갚기’라는 서글픈 목표가 적혀 있었다. 그는 매일 밤 무협지를 읽었다. 강호의 의리와 낭만, 무협 고수들의 기개… 그것만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크으, 검존의 일검에 천지가 진동하는구나! 이게 진짜 무협이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으며 화면 속 주인공의 검세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내일도 어김없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상사의 잔소리를 들으며 엑셀 시트를 채워야 했다. 그의 삶은 무협지 속 낭만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었다.
그날도 퇴근길, 그는 여느 때처럼 스마트폰으로 무협 웹툰을 보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무공을 깨우치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쾅!”
세상이 흔들렸다. 눈앞에서 모든 것이 비틀리고, 강렬한 빛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웹툰 속 주인공이 날린 비검(飛劍)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는 자신을 보았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빌어먹을 인생, 죽을 때까지 무협지나 보다가 가네.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어딘가 서글픈 최후였다.
***
눈을 떴을 때, 천장은 낯설었다. 희뿌연 벽지와 나무 서까래. 퀘퀘한 먼지 냄새와 함께 낯선 몸의 감각이 밀려왔다. 온몸의 뼈마디 하나하나가 삐걱이는 듯했고, 지독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죄어왔다. 손을 들어 올리자, 핏줄이 불거지고 굳은살이 박힌 거친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깔끔하고 마우스 질에만 익숙했던 자신의 손과는 전혀 달랐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낯선 톤이었다. 마치 변성기가 덜 끝난 소년의 목소리 같았다.
머릿속으로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진무’, ‘검술’, ‘문파’… 온통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이진우가 아니었다. ‘진무’라는 이름의, 무림의 변방에서 버려진 듯한 소년이었다.
이곳은 강호였다. 정확히는 강호에서도 가장 무시받는 산골, ‘청량곡’의 한 오두막이었다. 전생의 진무는 ‘청량문’이라는 조그마한 문파의 말단 제자였으나,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파문당해 이곳에서 홀로 연명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배운 검술은 있었지만, 내공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낙오자였다.
“이게… 진짜 이세계 전생인가?”
진무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텅 빈 배가 고통스러웠다.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창밖은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고, 어두침침한 오두막의 실루엣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뼈만 앙상한 갈비뼈가 만져졌다. 전생의 이진우는 적당히 근육도 붙어있고 배도 살짝 나온, 지극히 평범한 체형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은… 한 끼라도 먹으면 감격해서 눈물이라도 흘릴 듯한 형편이었다.
“배고파 죽겠네.”
진무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두막 안은 낡은 가구 몇 개와 먼지 쌓인 책 더미가 전부였다. 삶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삭막한 공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쓸 만한 검 한 자루가 벽에 걸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녹이 슬었지만, 손잡이는 여전히 단단했다.
그때, 오두막 한구석, 먼지 쌓인 책 더미에서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빛바랜 두루마리였다. 진무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것을 집어 들었다. 조심스럽게 펼치자, 붓글씨로 휘갈겨 쓴 글귀가 보였다.
『천하제일 무림대회. 십 년에 한 번, 강호의 운명을 결정할 단 한 명의 무인을 가리는 자리. 우승자는 천하맹주의 칭호와 함께 모든 분쟁을 조율할 절대적 권한을 얻는다.』
진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전생의 그가 밤마다 침을 흘리며 읽던 무협지 속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무림대회라니! 그것도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
두루마리의 글귀는 이어졌다.
『최근 강호는 혼란스러웠다. 마교의 준동, 정파와 사파의 갈등 심화, 그리고 북방의 이민족 침입 위협까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이에 각 문파와 세력은 천하맹주를 선출하여 혼란을 수습하기로 합의하였으니, 뜻 있는 무인들은 천하제일 무림대회에 참여하라!』
진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전생의 그가 꿈꾸던 강호의 모든 것이 이 두루마리 안에 있었다. 의협심, 권위, 명예, 그리고 무엇보다… 무공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 물론 지금의 자신은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이진우로서의 그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진무로서의 그는 문파에서조차 버려진 낙오자였다. 하지만 심장이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버려진 채 죽어갈 수는 없었다. 이 몸으로, 이 새로운 기회로, 그는 무림의 정점에 서야 했다. 그가 평생 꿈꿔왔던 무인의 삶을 살아야 했다. 더 이상 키보드나 두드리며 모니터 속 영웅들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자신이 그 영웅이 될 차례였다.
“천하제일 무림대회라….”
진무는 두루마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일단, 먹어야 했다. 그리고, 강해져야 했다. 무림대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이 오두막에서, 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그는 천하를 뒤흔들 무림 고수가 되리라 결심했다. 그의 무협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