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우는 제 삶의 9할을 회색빛 먼지 낀 서재에서 보냈다. 나머지 1할은 사건 현장이었다. 그의 삶은 딱 그렇게 나뉘어 있었다. 낡은 고서들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몸을 기댄 진우는 눈을 감고 있었다. 사방에 쌓인 책들은 그에게 방패이자, 때로는 칼날이기도 했다.
“강 탐정님! 대체 몇 번을 불러야 대답을 하세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박형사였다. 진우는 눈을 뜨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불러도 대답 없는 메아리인가… 제 뇌는 지금 만년 전의 우주를 탐사 중이라서 말입니다. 박 형사님께선 찰나의 우주를 뒤흔들었군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오세요. 강력계 박형삽니다! 당신 아니면 해결 못 할 사건이 터졌어요. 밀실 살인입니다.”
밀실 살인. 그 단어는 진우의 뇌를 찰나의 우주에서 현실로 끌어내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느릿하게 안경을 고쳐 썼다.
“밀실이라… 이번엔 어떤 어설픈 트릭일지 기대되는군요.”
***
사건 현장은 오래된 대저택이었다. 도시 외곽에 숨겨진 채,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짊어진 고색창연한 건물. 피해자는 희대의 시계 제작자 구태영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이자 집무실에서 발견되었다. 등에 단도로 보이는 날카로운 물건이 박힌 채.
“말 그대로 밀실입니다, 탐정님. 창문은 내부에서 걸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문은 이중 잠금 장치에 내부에서 걸어 잠근 빗장까지 완벽했죠. 문은 따서 들어갔습니다. 유일한 출입구인데…”
박형사가 한숨을 쉬었다. 진우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그의 눈은 낡은 가구들, 벽에 걸린 복잡한 태엽 장치들, 그리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계들을 스캔하듯 훑었다. 방 한가운데, 쓰러진 구태영의 시신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설계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그의 특기인 복잡한 시계 부품들이 흩어져 있었다.
“피해자의 사망 시각은 어젯밤 10시에서 11시 사이로 추정됩니다. 부검의 소견은 단번에 심장을 꿰뚫어 즉사라고 했어요. 현장에 남겨진 유일한 증거는 이 단도뿐입니다. 피해자의 것인지, 범인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진우는 말이 없었다. 그는 방을 한 바퀴 천천히 돌더니, 멈춰 서서 문을 응시했다. 무거운 참나무 문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잠금장치는 겉보기에도 견고했다. 그는 잠금장치 주변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리고는 시신 옆으로 다가갔다. 구태영의 손은 테이블 위로 늘어져 있었는데, 그의 손가락 중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두꺼운 양장본 책을 향해 미묘하게 뻗어 있는 것을 진우는 놓치지 않았다.
“피해자는 평소에 문을 잠그고 작업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족이라고는 먼 친척 한 명과, 그의 집에서 숙식하던 수제자, 그리고 집사가 전부예요. 모두 알리바이가 겹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겁니다.” 박형사가 답답한 듯 설명했다.
진우는 구태영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진 책에서부터 천천히 벽면을 타고 올라갔다. 오래된 벽지 위에는 수많은 시계들이 걸려 있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방 전체를 채웠다. 그러다 진우의 시선이 한 벽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괘종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괘종시계와 달리, 그 시계의 옆면에는 작은 장식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돌출되어 있었다.
진우는 그 괘종시계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손을 뻗어 시계의 묵직한 추를 만졌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시계의 장식 부분을 느릿하게 쓸었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 탐정님? 왜 그러세요?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박형사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듯했다.
진우의 눈앞이 일렁였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점점 커지고, 흐릿해졌다. 그의 눈동자에 빛이 응집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과거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오래된 필름 조각이 번개처럼 재생되는 것처럼.
(시간 여행 시작)
진우의 시야가 바뀌었다. 방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시신은 없었다. 대신 구태영이 테이블에 앉아 설계도에 몰두하고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그는 구태영의 수제자, 박민호였다. 그는 스승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갈등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
“스승님… 그 설계도, 제 것이었잖습니까.” 박민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구태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가르쳐주었느냐. 감히 그 재능을 오만한 마음으로 더럽히려 하느냐.”
그 한마디에 박민호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의 손에는 피해자의 등에 박혀 있던 바로 그 단도가 들려 있었다.
“오만이라뇨! 스승님이야말로 제 것을 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번개처럼, 박민호의 손에 들린 단도가 구태영의 등에 박혔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구태영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그의 손은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듯 쓸다가, 마지막 순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손은 본능적으로 바닥에 놓여 있던 두꺼운 양장본 책을 건드렸다.
‘쿵!’
책이 뒤집히면서,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작은 금속 장치가 드러났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에 걸려 있던 빗장이 ‘스르륵’ 하고 저절로 걸어 잠기는 소리가 진우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구태영의 서재는 사실 완벽한 밀실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몰두할 때 방해받지 않기 위해, 발로 밟거나 혹은 물건이 떨어져 눌리면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장치를 설치해 두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구태영 자신과, 그 장치 제작을 도왔던 수제자 박민호뿐이었다.
박민호는 자신이 스승을 죽인 것도 모자라, 방이 완전히 잠겨버린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의 눈이 방 안을 미친 듯이 훑었다. 그의 시선이 마침내 한곳에 닿았다. 바로 진우가 서 있던 그 거대한 괘종시계였다. 괘종시계 옆면에 돌출되어 있던 장식. 그것은 사실 시계의 진동이나 소리에 반응하여 비밀 통로를 여는 장치였다. 구태영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연구실을 외부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면서도, 비상시에는 빠르게 대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박민호는 시계의 특정 부분을 강하게 눌렀다. ‘쉬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괘종시계 뒤편의 벽이 옆으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감이 스쳤다. 그는 열린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그가 나가자마자, ‘쉬이이익… 쿵!’ 소리와 함께 벽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 여행 종료)
***
진우는 비틀거렸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식은땀이 흘렀다. 박형사가 놀라 그를 부축했다.
“강 탐정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겁니까?”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다시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밀실… 역시 어설픈 트릭이었습니다.”
그는 방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박형사님, 여기를 보십시오. 피해자의 손이 닿아 있던 이 책. 자세히 보면 책 모서리가 바닥을 향해 눌려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금속 장치가 있었을 겁니다.”
박형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책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데요…?”
“지금은 없겠죠. 범인이 시신을 발견한 척하기 전에 치웠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책이 눌러진 각도를 보십시오. 그리고 이 방의 문… 외부에서 조작할 수 없는 잠금장치라고 하셨죠? 하지만 피해자는 평소 작업 중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방에 아주 독특한 자동 잠금장치를 설치했습니다.”
진우는 말을 이었다. “피해자는 살해당하기 직전, 또는 살해당한 직후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바닥의 책을 건드렸습니다. 그 순간, 책 아래 숨겨진 자동 잠금장치가 활성화되면서 문이 내부에서 잠긴 겁니다. 범인인 박민호는 스승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스스로 밀실에 갇히게 된 겁니다.”
박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범인은 어떻게 나갔다는 겁니까? 그 자동 잠금장치라면, 내부에서 잠겼으니 밖에서는…”
진우는 묵묵히 괘종시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괘종시계 옆면의 장식처럼 보이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계 제작자 구태영은 자신만의 은신처를 만드는 데 천재였습니다. 이 괘종시계 뒤에는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습니다. 시계의 특정 부분을 조작하면 벽이 열리도록 되어 있죠. 박민호는 그 통로를 이용해 도주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모든 벽을 다 확인했습니다! 그런 통로는 없었습니다!” 박형사가 반박했다.
“그 통로는 박민호가 빠져나가자마자 스스로 닫히고, 완벽하게 밀봉되도록 설계되었을 겁니다. 구태영의 장인정신이죠.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진우는 시계 옆면의 장식 부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박민호는 이 부분을 조작하여 통로를 열었을 겁니다. 이 장식에는 미세한 지문이 남아 있을 겁니다. 어젯밤, 누군가 이곳을 강하게 눌렀을 때 생긴 마찰열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주 작은 균열이나 변형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박형사는 즉시 과학 수사팀을 불렀다. 정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잠시 후, 과학 수사팀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형사님! 여기! 시계 옆면 장식 안쪽에 미세한 지문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다른 곳보다 마찰열로 인한 변형이 감지됩니다!”
진우는 피식 웃었다.
“이 방은 처음부터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살인자가 만들어낸, 그리고 피해자의 마지막 행동이 겹쳐져 완성된 정교한 착시 현상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시선이 박민호에게 향했다. 수제자 박민호는 진우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결국 주저앉아 고개를 떨궜다. 그의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스승님은 저의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항상 자신의 그림자 아래에 저를 가두려 했어요… 그 설계도도… 제가 처음 구상했던 것인데…!”
밀실의 환상은 깨어지고, 그 안에 숨겨진 탐욕과 질투의 살인이 드러났다. 진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괘종시계를 응시했다. 과거의 찰나가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진실뿐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회색빛 서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음 어설픈 트릭을 기다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