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의 웅장한 문이 열리자, 죽음의 냄새와 피비린내조차 뚫고 들어오는 생존자들의 간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낡고 해진 관중석은 이미 만원이었다. 그들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그러나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안고 이곳, 마지막 보루라 불리는 ‘철혈 요새’에 모인 자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희망이 집중된 곳은 바로 이 원형 경기장, ‘절멸의 비무제’가 열릴 거대한 무대였다.
이진은 삐걱이는 나무 마루를 밟으며 천천히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문이 닫히며 외부의 소음과, 어쩌면 외부의 절망마저 차단했다. 경기장 중앙에 우뚝 선 비무대는 수십 개의 횃불에 둘러싸여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찬란하기보다는 섬뜩했다. 마치 도살장에 매달린 고기를 비추는 불빛처럼.
이진은 관중석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은 이미 괴질마의 아귀에 잡혀 한 줌 재로 변했거나, 혹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끔찍한 존재가 되었을 터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묵직한 돌덩이를 가슴에 품은 듯한 슬픔과 고통을 견디는 중이었다.
“강호의 영웅들이여, 그리고 살아남은 백성들이여!”
우렁찬 목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비무대 중앙에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의 풍채는 압도적이었으나, 그의 눈빛에는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깊은 고통이 스며 있었다. 무림맹의 맹주, 철혈지존 서문경이었다. 그는 피폐해진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듯 지쳐 보였다.
“우리는 지금, 절멸의 문턱에 서 있다.”
서문경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십 년 전, 동토에서 시작된 역병은 마침내 천하를 삼켰다. 괴질마라 불리는 그 끔찍한 존재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그 내면엔 오직 파괴와 굶주림만이 남아 있다. 그들은 이성을 잃고 오직 살과 피만을 탐하며, 그들의 손에 스치는 모든 생명은 곧 그들과 같은 괴물이 된다!”
관중석에서는 낮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잔혹한 진실이었다. 이진 역시 허리춤의 검집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사형, 사매, 그리고 그에게 무공을 가르쳤던 사부님까지. 모두 괴질마의 먹이가 되거나, 그들 중 하나로 변하는 끔찍한 모습을 보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그때의 끔찍한 기억들이 시뻘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철혈 요새는 마지막 보루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서문경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우리는 이 요새에 틀어박혀 죽음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힘을 모아 저 빌어먹을 역병의 근원을 찾아 박멸할 것인가?”
웅성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박멸? 어떻게? 그 수많은 괴질마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희망은 절망 속에 너무 깊이 파묻혀 있었다.
“이에, 무림맹은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서문경은 잠시 말을 멈추고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이진에게 잠시 머물렀으나, 이진은 그저 굳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늘부터 시작될 ‘절멸의 비무제’는 단순한 무인들의 자웅을 겨루는 장이 아니다! 이 비무의 승자는, 전 인류의 염원을 짊어지고 역병의 근원이라 알려진 ‘흑룡단’을 찾아내 제거할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흑룡단. 무림에 떠도는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동토 깊숙한 곳에 숨겨진, 모든 재앙의 씨앗이 담겼다는 그곳. 그러나 아무도 그 존재를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그것이 실재하는가? 설사 존재한다 한들, 괴질마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찌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관중석에서 술렁임이 거세졌다. 몇몇은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고, 몇몇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비무에 참여한 무인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번졌다. 모두가 괴질마를 피해 도망쳐 온 자들이었다. 이제 와서 그 심장부로 들어가라는 말은 죽음을 자처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진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이곳에 처음부터 그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왔다. 괴질마의 손에 스러져 간 모든 이들을 위해, 그리고 이 세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조각의 희망을 위해.
“승자에게는 무림맹의 모든 지원이 약속될 것이다! 천 년 전 창세기에 사용되었다는 전설의 보검 ‘벽해신검’과 그 검을 다루는 비술,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 무림맹이 모아온 영약과 병기들, 그 모든 것이 승자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서문경의 목소리에 다시금 미약한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벽해신검.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검이라 불리는 그것을 누가 다룰 수 있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검이 정말로 괴질마를 물리칠 힘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자, 이제 절멸의 비무제를 시작한다!”
서문경이 손짓하자, 비무대 주변의 횃불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웅장한 북소리가 경기장을 뒤흔들었고, 첫 번째 대결을 알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첫 번째 대결! 무공세가 진가의 마지막 후예, 진우! 그리고… 익명의 무인, 이진!”
이진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천천히 비무대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의 맞은편에서 한 청년이 다가왔다. 날렵한 인상에 제법 단단해 보이는 몸놀림. 진우는 명문 무공세가 출신답게 교만함이 살짝 엿보이는 표정으로 이진을 바라보았다.
“익명이라니, 제법 특이하군.” 진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딴 비무에서까지 이름을 숨기는 이유라도 있나?”
이진은 대답 대신 진우를 꿰뚫어 볼 듯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이름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단 하나. 이 비무에서 승리하고, 세상을 파멸시킨 존재들의 심장을 꿰뚫는 것뿐이었다.
진우는 이진의 무표정한 얼굴에 불쾌감을 느꼈는지, 순간적으로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의 주변 공기가 미약하게 일렁였다. 명문세가 출신답게 제법 탄탄한 내공을 쌓은 듯했다.
“좋아, 어디 익명의 무인께서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직접 확인해 주지.”
진우가 먼저 검을 뽑았다. 검에서 차가운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진우의 검이 이진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빠른 초식, 정교한 궤적. 그러나 이진의 눈에는 그 모든 움직임이 느리게만 보였다.
이진은 여전히 허리춤의 검을 뽑지 않은 채, 단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진우의 검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지만, 이진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진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자신의 검술이 이렇게 허무하게 피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건방진…!”
진우는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연속되는 검강이 마치 폭풍우처럼 이진을 덮쳤다. 이진은 좌우로 몸을 피하며 진우의 검격을 전부 흘려냈다. 그는 마치 바람처럼 가볍고, 그림자처럼 예측 불가능했다.
관중석에서는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진우의 무공은 분명 뛰어났다. 하지만 이진은 마치 한 차원 다른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어떤 무공도 쉽게 간파하고 흘려버리는 듯한 움직임.
마침내, 이진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진우의 검이 그의 심장을 향해 직격하려는 순간, 이진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검은 한 줄기 섬광 같았다.
차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경기장을 갈랐다. 진우의 검이 이진의 검에 부딪히며 엄청난 충격과 함께 튕겨 나갔다. 진우의 손에 든 검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앞의 청년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 진우는 이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속에서, 진우는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이진은 자신의 검을 비스듬히 세우고 있었다. 검날에는 방금 전 진우의 검과 부딪히면서 생긴 아주 미세한 흠집 하나 없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검에서는 어떠한 검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듯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큰 위압감을 선사했다.
“이제, 끝을 내자.”
이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진의 몸이 홀연히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여 잔상만 남겼을 뿐이었다. 진우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이진의 검이 자신의 목에 닿아 있었다. 차가운 검날이 피부에 닿는 순간, 진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지만, 그의 패배는 확실했다.
“크헉…!”
진우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검은 이미 손에서 놓쳐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이진은 아무 말 없이 검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마치 당연한 결과를 본 듯이.
경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명문 무공세가의 후예 진우가, 저 익명의 무인에게 단 한 합 만에 제압당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진은 쓰러진 진우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서문경 맹주가 있는 곳을 향했다. 맹주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깊은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이진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듯, 조용히 비무대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맹세만이 피처럼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사부님, 그리고 모두… 반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