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이었다. 도시의 불빛은 창밖에서 수억 개의 눈동자처럼 깜빡였고, 23층 아파트의 강우진은 고요함 속에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방금 명상을 마친 참이었다. 복부에 모인 기운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온몸의 혈관을 따라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이 고요함이야말로 그가 이 각박한 도시에서 겨우 찾아낸 안식처였다.
그때였다. 찌르르륵, 하고 거실 스탠드 등이 짧게 깜빡였다.
우진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벌써 수명이 다했나.”
별다른 생각 없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발을 떼는 순간, 주방에서 짤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컵이 식탁 위에서 미끄러지며 부딪히는 소리였다.
우진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뭐지?”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그가 물을 마시기 위해 올려두었던 유리컵이 있었는데, 정확히 3cm가량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주변에는 물기가 없었고, 테이블도 완벽히 수평이었다.
“바람인가.” 우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기 시설을 통해서도 그런 미미한 힘으로 유리컵이 움직일 리 없었다. 그는 컵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탁, 하고 안방 문이 저절로 닫혔다. 우진은 분명 문을 살짝 열어두었었다.
“젠장.”
점점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안방 문을 다시 열었다. 삐걱이는 경첩 소리가 유난히 신경에 거슬렸다. 침대 위에는 어제 벗어두었던 티셔츠가 있었는데, 아주 깔끔하게 반으로 접혀 있었다.
“누가 장난치나?” 우진은 순간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닫힌 공간에서 자신 말고 다른 존재가 있다는 상상. 그는 본능적으로 온몸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수십 년간 수련해 온 무인의 육감은 단순한 오작동이나 착각을 넘어선 무언가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새벽 두 시쯤, 툭, 툭, 툭.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것 같은.
윗집에서 늦게까지 뭘 하는 건가? 우진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소리는 벽을 타고 그의 머리맡에서 울리는 듯했다. 차가운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그의 목소리는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툭, 툭, 툭. 소리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빠르고 강하게. 마치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그는 잠옷 차림으로 거실로 나왔다. 집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천장에서 들리던 소리도 멎었다. 그러나 이내 냉장고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우진은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냉장고 속 식재료들이 모두 엉망진창으로 섞여 있었다. 야채 칸의 채소들이 선반 위에 굴러다니고, 계란은 깨져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치겠는가.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나와라.” 우진의 목소리에 진기가 실렸다. 그는 이제 이 현상이 단순한 미신이나 착각이 아님을 확신했다. 뭔가 알 수 없는 존재, 혹은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의 공간을 침범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오랜 수련으로 깨달은 ‘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의 커다란 스탠드 조명이 와장창, 하고 쓰러졌다. 유리갓이 깨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건 도발이었다.
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미약한 움직임이 잡혔다. 그것은 형태는 없지만, 냉기와 불안정한 기운의 덩어리로 느껴졌다. 마치 흐느끼는 듯, 비명 지르는 듯한 탁한 기운이었다.
“너의 존재를 알겠다.”
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옅은 푸른빛이 감돌았다. 손끝에서부터 강력한 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기운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그것은 원한, 고통, 그리고 억눌린 분노의 파편들이었다. 이 아파트, 혹은 이 공간에서 불행하게 죽어간 누군가의 잔재였다.
끼이이이익!
이번에는 모든 주방 서랍이 동시에 열리며 안의 내용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칼붙이들이 바닥에 부딪히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냄비와 프라이팬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마치 무형의 존재가 팔다리를 휘두르며 분노를 표출하는 듯했다.
“진정해라.” 우진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이 솟구쳐 오르던 프라이팬을 향해 뻗어 나갔다. 팟! 손바닥에서 뿜어진 기운이 프라이팬을 강하게 때렸다. 프라이팬은 찌그러진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몸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이 있었다. 샥!
우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칼날을 피했다. 칼은 벽에 박혔고, 깊은 홈을 남겼다. 이 무형의 존재는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를 해치려 하는가.”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단전에 모인 기운을 전신으로 퍼뜨렸다. 몸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차가운 기운의 흐름, 그것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왜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방에서 거실로, 그리고 안방으로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갇힌 짐승처럼 날뛰는 듯했다.
우진은 서서히 움직였다. 발걸음마다 미약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흘렀다. 그는 이 아파트 전체를 자신의 기운으로 감싸 안으려는 듯했다. 방패를 두르듯, 그의 내공이 아파트의 사방 벽을 타고 스며들었다.
“넌 이곳에 갇혔다.” 우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러자 공기 중의 냉기가 더욱 심해졌다. 얼음 칼날이 그의 살갗을 베는 듯한 차가움이었다. 쿵! 쿵! 쿵! 모든 문과 창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창밖의 도시 불빛이 흔들리는 유리창 너머로 일렁였다. 무형의 존재가 온 힘을 다해 그의 영역을 깨뜨리려 하는 듯했다.
“소용없다.” 우진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발생한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방 전체를 휘감았다. 탁한 기운을 정화하려는 듯, 푸른빛이 공간을 감쌌다.
무형의 존재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폭풍이 집 안에서 몰아쳤다. 거실의 소파가 뒤집어지고, TV가 화면이 깨진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책장의 책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집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나 우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자세는 확고했고,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그는 그 난동 속에서도 진정한 기운의 중심을 찾아내려 애썼다. 원한의 기운은 실체가 없기에,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그 뿌리를 찾아 정화해야 했다.
“그 고통을 알겠다.” 우진은 고요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묶여서는 안 된다. 너의 고통이 너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을 뿐.”
그는 손바닥을 펼쳤다. 중앙에 모인 푸른 진기가 더욱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을 천천히, 그러나 강력하게 방출하기 시작했다. 옅은 파동이 집 안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파동은 탁한 기운을 씻어내듯, 불안정한 에너지를 흡수하는 듯했다.
끼야아아악!
비명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그의 귓전을 강하게 때렸다. 무형의 존재가 형체 없는 거대한 그림자처럼 우진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덮치려 했다. 그 순간, 우진은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장풍!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바닥이 그림자 같은 존재를 밀쳐냈다. 그것은 벽에 부딪히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옅어진 차가운 기운이 여전히 공간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격렬하게 날뛰지는 않았다.
“이제 쉬어라.”
우진은 다시 손을 모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운을 집중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맑은 기운이 집 안 전체를 감쌌다. 깨지고 부서진 가구와 물건들 사이로, 은은한 온기가 퍼져나갔다. 차가웠던 공기가 서서히 따뜻해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집 안은 난장판이었지만, 그 모든 파괴의 흔적 위로 묘한 평온이 감돌았다. 더 이상 불안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툭, 툭, 툭 하던 소리도, 짤그랑거리던 컵 소리도, 냉장고 문 열리는 소리도 모두 멎었다.
우진은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 사이를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옅은 안도가 서려 있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깜빡였지만, 더 이상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조용해지겠군.”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깨진 스탠드 조명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그의 아침은 평소보다 훨씬 더 소란스럽게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적어도 이제 혼자만의 고요한 싸움은 끝났음을 알았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영원히 쉬지 못했던 한 영혼이 이제야 비로소 안식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것이 혼탁한 도시에서 그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빛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