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금속성 마찰음이 뼈를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돌문이 마침내 열렸다. 수천 년의 세월이 겹겹이 쌓인 먼지가 희미한 탐조등 불빛에 춤을 추며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길을 알렸다. 김민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낡은 가죽 장갑을 고쳐 꼈다. 그의 옆에 선 이선아는 이미 산소통을 확인하고 마지막 장비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단단한 눈빛은 흔들림 없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준비됐어?” 선아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가라앉았다.
민준은 헤드램프의 불빛을 조정하며 희미하게 보이는 통로를 비췄다. “준비될 리가. 이딴 곳에 누가 온전히 준비할 수 있겠어?”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해낼 수밖에.”
그들이 찾아 헤맸던 ‘심연의 제단’으로 통하는 입구는, 그 어떤 고고학 서적에도 기록되지 않은 채 수천 년간 잠들어 있었다. 한 고대 문명이 스스로를 지우고 봉인했던 마지막 장소. 이 모든 것은 민준의 할아버지, 고고학계의 이단아로 불리던 김 박사의 마지막 수첩에 담긴 기이한 단서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발걸음을 내딛자마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곰팡이와 흙,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끈적한 냄새가 뒤섞여 목을 졸랐다. 통로의 벽면은 거친 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간간히 보이는 조각들은 오랜 세월 마모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어딘가 불길한 에너지를 내뿜는 듯했다.
“이봐, 이거 봐.” 선아가 탐조등으로 한 지점을 비췄다.
벽면에 새겨진 문양은 인간의 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대한 촉수들이 뒤얽히고, 눈알이 박힌 듯한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치 심연의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형상화한 듯했다.
“젠장, 이런 건 난생 처음 봐.” 민준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문양을 훑었다. “할아버지가 말했던 ‘뒤틀린 세계의 흔적’인가….”
그들이 약 20분가량 침묵 속에서 통로를 걷자, 시야가 서서히 넓어졌다. 곧 통로는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이어졌다. 탐조등 불빛이 닿는 곳마다, 믿기지 않는 풍경이 드러났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마치 거대한 손이 진흙을 빚어 만든 것 같은 기괴한 기둥들이 불규칙적으로 솟아 있었다. 기둥들은 어떤 규칙도 없이 서 있었지만, 그 모든 기둥들이 한가운데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단은 거친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표면에는 방금 본 것과 유사한, 아니, 훨씬 더 복잡하고 끔찍한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세상에…” 선아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아무리 험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베테랑이었지만, 이 광경 앞에서는 경외와 공포가 뒤섞인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민준은 제단에 다가가 손전등을 비췄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검은 돌 표면이 마치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거대한 존재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손끝에서 스멀거리는 섬뜩한 한기. 그는 직감했다. 이곳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무엇인가, 혹은 너무나 거대해서 죽음조차 초월해버린 무엇인가의 공간이었다.
“이 문양들… 자세히 보면…” 민준은 제단 표면의 문양에 얼굴을 바싹 대고 들여다봤다. “이건 언어가 아니야. 어떤 좌표 같기도 하고… 아니, 이건….”
그의 말을 듣던 선아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등 뒤의 어둠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민준아, 방금… 저기 뭔가 지나갔어.”
“뭐라고?”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
“아니야, 분명히… 그림자 같은 게 움직였어. 너무 빨라서 형체는 못 봤지만.” 선아의 목소리에 미약한 떨림이 섞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허리에 찬 권총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민준은 제단에서 몸을 떼고 선아의 옆에 섰다. “착각일 거야. 여기서 뭐가 움직일 수 있겠어.” 하지만 그의 심장도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지하 깊은 곳의 고요는 사람의 신경을 갉아먹는 칼날과도 같았다.
바로 그때, 민준의 귀에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마치 수천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웅얼거리는 듯한,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것은 귀로 듣는 소리라기보다는, 뇌 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들었어?” 민준은 선아를 돌아봤다.
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방금… 속삭이는 소리… 뭐지?”
“모르겠어… 젠장, 머리가 울려.” 민준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속삭임은 점점 더 커지고, 명확해지는 듯했다. 이제는 그 속삭임이 하나의 단어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언어로. 하지만 그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그의 영혼이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듯했다.
*오라… 오라…*
그때였다. 민준이 기대어 서 있던 기둥 중 하나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기둥을 바라봤다. 그저 거친 돌기둥처럼 보였던 그것의 표면이, 자세히 보니 무수히 많은 미세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피부 같았다.
“선아, 이 기둥… 뭔가 이상해.” 민준이 나직이 말했다.
선아는 민준의 시선을 따라 기둥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다시 한번 공포에 질려 커졌다.
“민준아… 저 기둥… 눈이 있어!”
민준은 퍼뜩 고개를 돌려 기둥을 다시 살폈다. 선아의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의 등골에는 이미 차가운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탐조등 불빛이 기둥의 상단부를 비췄을 때, 그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거대한 돌기둥의 표면에 마치 오랜 세월 마모된 눈동자처럼 움푹 파인 두 개의 구멍이 있었다. 그것들은 형태가 없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을 똑바로 응시하는 듯한 기이한 압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속삭임은 이제 거의 비명에 가까워졌다. 민준의 머릿속에서 고대 언어의 파편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잠에서 깨어나라. 문이 열렸노라. 어둠이 춤추리라.*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굳건해 보이던 돌기둥의 눈꺼풀이, 아주 느리고 끔찍하게 움직였다.
메마른 돌이 긁히는 소리가 온 공간을 메웠다. 돌의 눈꺼풀이 기괴하게 벌어지자, 그 안에서 어떤 심연조차도 담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대적인 어둠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빛이 없는 어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살아있는 어둠이었다.
“도망쳐!” 민준이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선아는 이미 권총을 뽑아들고 뒤돌아섰지만,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사방에서 수십, 수백 개의 눈이 동시에 뜨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모든 기둥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하나의 거대한 존재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든 불빛이 꺼졌다.
민준의 손에 들린 탐조등도, 선아의 헤드램프도, 모든 전자기기가 동시에 멎었다.
그들은 이제 눈앞의 어둠 속에서, 오직 소리 없는 비명과 피부를 긁는 듯한 차가운 감촉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민준의 귓가에, 이제는 너무나 선명하게 들리는 고대의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깨어났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