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햇살이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첨탑을 감싸 안았다. 고대 신들의 축복이라도 받은 양 우뚝 솟은 백색 건물들은 언제나 위엄과 신비로움을 뽐냈지만, 적어도 나, 레온에게는 숨 막히는 답답함의 상징에 불과했다. 이세계에서 환생하여 주어진 새로운 삶. 어릴 적부터 남다른 마법 재능을 보이며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정작 나는 이 모든 영광 뒤에 숨겨진 차가운 계산과 엄격한 규율에 매일 지쳐갔다.
“레온, 또 멍 때리고 있냐? 이봐, 설마 어제 그 과제 아직도 안 끝냈어?”
어깨를 툭 치는 건 학원의 동기이자 나의 유일한 ‘진정한’ 친구인 카인드였다. 황금빛 머리카락과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가진 그는, 이 학원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그나마 인간적인 면모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녀석 중 하나였다.
“과제? 아, 응… 뭐, 거의 다 했지.”
나는 대충 둘러댔다. 사실 어제 과제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학원의 오래된 소문 때문에 잠시 다른 길로 새 버렸던 참이었다. ‘금단의 지하 서고’. 학원 창립 당시부터 존재했다는 전설적인 공간으로, 학원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다는 소문만 무성한 곳이었다. 그곳에 고대 금기 마법이나, 혹은 학원의 어두운 비밀이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그 누구도 그 입구를 본 적은 없었다.
“거의 다 했다고? 어제 저녁부터 도서관에서 사라지더니, 설마 또 엉뚱한 거 파고다닌 건 아니겠지?” 카인드가 삐딱하게 물었다. 그의 눈썰미는 귀신 같았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무슨 소리야. 그냥 잠시 바람 쐴 겸 산책했지. 이 학원이 생각보다 넓잖아.”
카인드는 콧방귀를 뀌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어쨌든 조심해. 요즘 교장님과 교수님들이 전반적으로 예민하시다고. 특히 마력 감지반은 매일 밤마다 지하를 순찰하는 모양이던데. 뭔가 숨기는 게 있거나, 아님 지하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걸 거야.”
그 말에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하 순찰이라니. 그건 내가 파고들고 있던 소문과 직결되는 내용이었다.
“지하에… 문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냥 선배들이 그러던데, 이상한 마력 흐름이 감지된다나? 교장실 아래쪽에서 말이야.”
교장실 아래쪽… 그곳은 바로 학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앙 탑의 지하와 연결되는 지점이었다. 학원의 심장부. 그곳이라면 ‘금단의 지하 서고’가 존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나는 어젯밤, 교묘하게 마력 감지망을 피해 중앙 탑의 가장 오래된 서고 구석에서 기이하게 비틀린 마법진을 발견했었다.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곳. 분명 봉인된 통로였다.
카인드와 헤어진 후, 나는 다시금 중앙 탑으로 향했다. 어제 발견한 마법진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력 감지반의 순찰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내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뭔가 숨겨져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어둑하고 고풍스러운 서고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양피지와 잉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구석진 벽면에 기대어 있던 낡은 책장을 밀어내자, 어젯밤 내가 발견했던 비틀린 마법진이 드러났다. 검은색 돌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은 마치 살아있는 듯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봉인 마법. 단순한 봉인이 아니었다. 안에서 무언가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혹은 밖에서 무언가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강력한 억압의 마법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마나석을 꺼내 마법진에 갖다 댔다. 내 특기인 ‘마나 분석’ 능력으로 마법진의 구조를 읽어 내려갔다. 복잡하게 얽힌 마법식들 사이에서 어딘가 비틀리고 뒤틀린, 고통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봉인 마법과는 확연히 다른, 불길한 느낌.
내 손가락에서 희미한 마나 흐름이 발생했고, 나는 마법진의 일부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약 잘못 건드렸다간 학원 전체의 마력 시스템에 오류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약 5분 정도 집중하자, 마법진의 검은 선들이 희미하게 빛나더니, 이내 검은 돌바닥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지하로 통하는 어두운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하고 습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곰팡이 냄새와 함께 묘한 쇠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은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듯했다. 내 발소리만이 적막한 지하 공간에 울려 퍼졌다. 휴대용 마법 등불을 밝히자, 시야가 확보되었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복도가 나타났다. 일반적인 지하 서고의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연구 시설에 가까웠다. 낡고 녹슨 마나 램프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양옆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철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문들에는 모두 고대 언어로 쓰인 경고문과 함께 봉인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한 철문 앞에 멈춰 섰다. 다른 문들과는 달리, 이 문에는 유독 강력한 억압의 마법진이 여러 겹으로 덧씌워져 있었다. 마치 안의 무언가가 필사적으로 밖으로 나오려 했던 흔적 같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뻗어 문에 새겨진 마법진을 건드렸다.
“이건… 제약 마법? 아니, ‘생명 흡수’ 마법진이라고?!”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단순한 봉인이 아니었다. 안의 존재에게서 무언가를 강제로 빼앗아가는 마법. 그것도 생명력을…! 역겨운 위화감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나는 더 이상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이 문 뒤에 무엇이 있든, 그것은 학원의 명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끔찍한 진실을 품고 있을 터였다.
나는 가지고 있던 비상용 잠금 해제 마법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이것만큼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비장의 카드였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강력한 잠금 해제 마법이 발동되자, 철문에 덧씌워진 봉인 마법진들이 비명을 지르듯 터져 나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냉기와 함께 역겨운 피비린내가 내 코를 강타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거대한 원형 공간. 그 중심에는 심장처럼 쿵, 쿵, 하고 주기적으로 맥동하는 거대한 수정이 있었다. 수정은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지만, 그 빛은 어딘가 병적이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수정에서는 수십 개의 굵은 마나 도관들이 뻗어 나와 벽면을 따라 늘어선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무언가’는… 투명한 마법 유리관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유리관들이 마치 거대한 벌집처럼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리관들 안에는…
나는 충격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유리관 안에는, 생명체들이 들어있었다. 희미하게 움직이는 형태들. 어떤 것은 인간의 형상에 가까웠고, 어떤 것은 알 수 없는 기이한 괴물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가느다란 마나 도관들이 꽂혀 있었고, 그 도관들을 통해 생명력이 서서히 수정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듯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고통과 절규의 흔적이 역력했다. 어떤 유리관 안에서는, 아직 어린아이로 보이는 작은 형체도 보였다.
“이… 이건…”
내 입에서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온몸의 피가 식어버리는 듯한 충격과 공포가 나를 덮쳤다. 이건 단순한 마법 실험이 아니었다. 이건… 생명 착취였다. 이 학원의 ‘Elemental Conflux(원소 합류)’ 마법. 이 학원의 자랑이자, 내가 그토록 동경했던 그 강력한 마법의 근원이… 이 끔찍한 생명체들의 피와 살, 그리고 영혼을 빨아들여 만들어진 것이었단 말인가?
나는 이세계에서 환생하기 전,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동경했던 마법 학원의 진실이 이토록 잔혹하고 추악할 줄이야.
그때였다. 내 등 뒤에서 섬뜩한 마력 흐름이 감지되었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강력한 마법사. 이 거대한 비밀을 지키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려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차가운 그림자가 끔찍한 생명 착취의 현장을 서서히 덮어갔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울려 퍼졌고, 입에서는 겨우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젠장… 들켰어…!”
나는 유리관 속의 고통받는 생명체들을 뒤로하고, 절규와 함께 복도로 뛰쳐나갔다. 이대로 잡혔다간, 나 역시 저 유리관 속의 생명체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이 학원은… 겉보기에는 찬란했지만, 그 이면에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비밀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눈앞의 모든 것이 혼란과 절망으로 뒤섞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