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되돌아온 저주
건물은 죽어 있었다. 아니, 죽음조차 멀리 달아난, 생명 없는 허물이 눅눅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한때 번성했을 병원의 폐허는 이제 부패한 기억의 전당이 되어, 곰팡이 냄새와 눅진한 습기가 공기 중에 희박하게 맴돌았다. 깨진 창문 너머로 회색빛 하늘이 조각조각 박혀 있었고, 앙상한 나무 그림자가 바닥의 먼지 위를 기어 다녔다.
민준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며칠 밤낮을 쫓겨 다녔는지, 아니면 몇 주를 헤맸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시간은 그의 기억 속에서 진흙탕처럼 뒤엉켜 버렸고,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찢어진 옷자락, 갈라진 입술, 핏발 선 눈동자.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짐승처럼 사냥당하는 희생양일 뿐.
마침내, 이 낡은 건물 가장 깊숙한 곳, 한때 수술실이었을 법한 차가운 공간에 다다랐을 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지훈이었다.
그는 변해 있었다. 너무나도 끔찍하게, 알아볼 수 없게 변해 있었다. 한때 따뜻한 빛이 깃들었던 눈은 이제 심연처럼 검고 차가웠다. 그의 얼굴은 병적으로 창백했고, 뼈대가 고스란히 드러난 앙상한 몸은 검은 그림자 속에 흡수될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고 강렬했다. 마치 차가운 강철 같은 의지, 아니, 그보다 더 끈질긴 무언가가 그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민준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더 이상 도망칠 기력도, 외칠 목소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지훈은 더 이상 과거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던져 넣었던 구렁텅이에서 기어 올라온 복수의 화신이었다.
“지… 지훈아….”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이름만 불러도 혀끝이 따갑고 목구멍이 타는 듯했다.
지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민준을 꿰뚫어 볼 듯 응시할 뿐이었다. 그 시선은 뜨거움도, 차가움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의 모든 감정이 증발해 버린, 텅 빈 거울 같았다. 민준은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의 추악한 과거가 낱낱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
“네가… 네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어….”
민준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더러운 타일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불결한 핏자국 같은 것을 스쳤다.
그때, 지훈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마치 굳어버린 조각상이 비로소 숨을 쉬는 듯 어색하고 느렸다.
“살아 있다고 생각했나?” 지훈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긁어대는 듯한 소리, 혹은 부서지는 얼음 조각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나는 오래전에 죽었어. 네가, 네 손으로 나를 찢어 발겨 죽였다.”
그 말에 민준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지훈아! 나는 그저… 그저 힘이 필요했을 뿐이야! 우리를 위한 힘! 너를 위한 힘이었어!”
지훈은 비웃음조차 없는 미동 없는 얼굴로 민준을 바라봤다. “나를 위한 힘? 네가 내게서 빼앗아 간 것이 무엇인지 기억해? 나의 기억, 나의 감각, 나의 미래… 나의 모든 것을 그 빌어먹을 제단에 바치면서, 나를 위한 힘이라고?”
민준의 눈이 공포로 크게 뜨였다. 그는 숨 쉬는 것을 잊은 듯 굳어버렸다.
“그 끔찍한 날 밤… 네가 내 손목을 그었고, 내 심장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너는 그저 지켜보고 있었지. 그 웃기지도 않는 주술사의 주문에 맞춰 나의 숨통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네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어.”
지훈은 천천히 민준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발소리는 타일 바닥에 닿을 때마다 죽은 자의 발소리처럼 메아리쳤다. 민준은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지훈의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올라가 그의 얼굴에 닿았다.
“너는 내가 죽었다고 믿었지.” 지훈은 민준의 바로 앞에 섰다. 그들의 코끝이 닿을 듯 가까웠다. “그래, 나는 죽었어. 하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었어. 새로운 시작이었지. 네가 열어준 문 너머로, 나는 더 깊은 곳을 보았어. 네가 그렇게 갈망하던 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똑똑히 알게 되었지.”
지훈의 손이 민준의 뺨으로 향했다. 차갑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민준의 얼굴을 스치자, 민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손은 마치 시체의 손 같았다.
“이제 네가 경험할 시간이야, 민준아.” 지훈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내게 그랬듯이, 나는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씩 빼앗아 갈 거야. 네 기억, 네 감각, 네 미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네 존재 그 자체를.”
민준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섬뜩한 환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가락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것이 보였고, 천장에 매달린 조명에서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냄새가 역겹게 느껴졌다. 썩은 살과 피비린내가 뒤섞인 악취가 그의 코를 찔렀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민준이 겨우 말을 잇자, 지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를 제물로 바쳤던 그 존재에게서, 나는 새로운 지식을 얻었어. 복수는 단순히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야. 영혼을 뒤틀고, 현실을 조롱하며,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거야.”
지훈의 눈이 번뜩였다. 그 심연 같은 눈동자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핏기 없는, 공포에 질린, 끔찍하게 일그러진 노인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 민준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이것은 자신인가? 아니면, 자신이 될 미래의 모습인가?
환상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그의 피부가 급격히 늘어지고, 머리칼이 희끗희끗 변하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검버섯이 피어났고, 그의 치아는 마치 늙은 개처럼 헐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그의 몸을 강제로 역행시키는 듯했다. 아니, 역행이 아니었다. 가속이었다. 그의 삶이 지독한 속도로 늙어가고 있었다.
“내가 네게서 젊음을 빼앗았지.” 지훈이 말했다. “이제 너는 한순간에 수십 년의 시간을 강요받게 될 거야. 네가 내게서 빼앗아갔던 시간의 대가로.”
민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주름지고 쭈글쭈글해진 손. 힘없이 축 처진 피부. 이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고작 서른 살이었다.
“그리고… 네 기억도.” 지훈은 손을 들어 민준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순간, 민준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부모님의 얼굴, 친구들과의 추억… 모든 것이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빠르게 돌다가 이내 찢겨 나가는 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지훈이라는 남자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오직 남은 것은 고통과 공포,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알 수 없는 죄책감뿐이었다.
민준은 무의식적으로 지훈의 팔을 잡으려 했으나, 그의 손은 힘없이 미끄러졌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입술은 바르르 떨렸다.
“지… 지… 누구… 시죠…?”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늙고 병든 노인의 눈물이었다.
지훈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민준을 응시했다. 그는 민준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그를 잠식하는 시간과 망각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민준의 눈은 점점 더 흐려졌고, 그의 몸은 더욱 쭈그러들었다.
“이것이… 네가 내게 했던 일의 거울이야.” 지훈은 차가운 속삭임으로 말했다. “네가 나를 잊으려 했던 만큼, 너도 스스로를 잊게 될 거야. 네가 나를 지웠던 만큼, 네 존재는 희미해질 거야.”
민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기억을 잃어버리는 고통 속에서, 본능적으로 한 가지 사실만은 희미하게 붙들고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
“왜… 왜… 저에게… 이러세요….” 늙은 노인이 된 민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지훈의 발치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슬픔과 공포가 뒤섞인,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았다.
지훈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차가운 만족감이 번뜩이는 듯했다.
“나는 그저… 되돌려주는 것뿐이야.”
그의 말이 끝나자, 수술실 안의 깨진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희미한 빛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늙고 쇠약해진 남자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텅 빈 폐허 속을 떠돌았다. 그 울음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우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완벽한 망각 속의 비명이었다. 지훈은 그 모든 것을 차갑게 응시하며, 다음 단계를 계획하고 있었다.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