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 서고, 숨겨진 균열
“크아악! 지각이다!”
강휘는 혼비백산하여 복도를 질주했다. 아침 식사 대신 베개와 사랑을 속삭이느라 벌써 마법 실기 수업 시작 5분 전이었다. 아르카나 마법학원의 웅장한 대리석 복도는 강휘의 구겨진 교복만큼이나 매끈하고 윤이 났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속도뿐이었다.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코너를 돌자, 쾅! 하고 거대한 무언가와 부딪혔다.
“으윽… 아파라…”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은 강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하필이면, 재수 없게도, 전교 수석이자 모든 학생들의 귀감이 되는, 심지어 재채기마저 우아할 것 같은 아르카나의 별, 유하와 부딪힌 것이었다. 그녀의 완벽하게 정리된 은발 머리카락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지만, 손에 들려 있던 두꺼운 마법서와 깃펜 몇 자루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강휘 씨,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유하의 싸늘한 목소리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차가운 이성과 약간의 짜증이 서려 있었다. 강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못 봐서… 아니, 너무 급해서… 으음… 부딪힌 건 정말 죄송합니다!”
황급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흩어진 책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유하는 한숨을 쉬며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강휘의 손이 닿은 낡은 양장본을 가리켰다.
“그 책은… 만지지 마세요.”
강휘는 고개를 들어 유하를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복잡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그림자가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완벽하고 흔들림 없던 유하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네? 어… 알겠습니다.”
강휘는 얼떨결에 손을 거두고 다른 책들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유하는 말없이 책들을 받아들고는 아까 그 낡은 양장본만 직접 주워 들었다. 먼지투성이의 검은 표지에는 금색 실로 알 수 없는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마치 수천 년 전의 유물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됐어요. 늦기 전에 수업에 가세요.”
유하는 차갑게 말했지만, 강휘는 그녀의 손에 들린 책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하고, 동시에 강한 마력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 책을 조심스럽게 안고는 강휘를 스쳐 지나갔다.
“어? 야, 강휘! 너 왜 아직 여기 있어? 교수님이 마법진에 네 이름을 새겨 넣으실 기세라고!”
때마침 멀리서 준영의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준영에게 달려갔다.
“야, 너 몰랐지? 젠틀한 교수님이 오늘은 ‘분노의 번개 마법’을 보여주실 예정이라고!”
준영의 말에 강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뒤늦게 허둥지둥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아까 유하의 표정과 그녀가 들고 있던 낡은 책의 문양이 계속 맴돌았다.
***
그날 저녁, 아르카나 마법학원 게시판에 새로운 공고가 붙었다.
**【특별 공지: 지하 대서고 제7열람실 및 그 하위 구역 잠정 폐쇄 안내】**
* **일시:** 금일부로 별도 공지 시까지
* **사유:** 서고 구조 안전 점검 및 마력 흐름 안정화 작업
* **협조:** 해당 구역 출입 통제에 적극 협조 바랍니다. 무단 침입 시 엄중한 처벌이 따를 수 있습니다.
강휘는 준영과 함께 게시판 앞에 서서 공고를 읽었다.
“젠장, 며칠 전부터 교수님들이 묘하게 신경질적이다 싶더니… 결국 사고라도 났나 보네. 제7열람실이면… 좀 깊은 곳 아니냐?” 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거기서 더 내려가면 일반 학생은 출입 금지된 구역 아니었어? 뭐 마력 통로가 복잡해서 위험하다던가…”
강휘의 눈에 문득 게시판을 지나가는 유하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공고를 힐끗 보더니, 평소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뭔가 그녀와 이 공고가 연결되어 있다는 기시감이 강휘의 뇌리를 스쳤다.
***
다음 날, 마법 약학 실습 시간.
강휘는 ‘비행 물약’ 제조 실습 중이었다. 투명한 유리병에 보라색 약액을 넣고 녹색 연기가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어째 강휘의 약병에서는 흙탕물 같은 누런 액체만 부글거리고 있었다.
“강휘 씨! 제가 분명히 스컬포지 버섯은 한 조각만 넣으라고 했죠? 지금 그건 거의 한 덩어리인데요?!”
약학 교수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강휘는 잔뜩 풀이 죽은 채 비실거렸다.
“아, 그게… 너무 작아서 더 넣어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바로 마법 약학의 함정입니다!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죠. 좋습니다, 강휘 씨. 이번 학기 마법 약학 과제 점수는 지하 대서고 특별 봉사로 대체하겠습니다.”
“네? 지하 대서고요?!”
강휘는 펄쩍 뛰었다. 지하 대서고는 아르카나 마법학원에서도 손꼽히는 음침하고 으스스한 곳이었다. 방대한 마법서와 고문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오래된 마법의 잔향이 공기 중에 가득한 곳. 특히 구석진 곳은 학생들 사이에서 괴담이 돌기도 했다.
“네. 제7열람실 하위 구역이 폐쇄되면서, 상위 구역의 도서 재배치 작업이 필요합니다. 오늘 방과 후에 대서고 관리실로 오세요.”
강휘는 망연자실했다. 마법 약학 F학점 대신 대서고 특별 봉사라니. 이건 차라리 F학점을 받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과 후, 강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하 대서고로 향했다. 대서고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향이 코를 찔렀다. 층계참을 한참 내려가자, 대서고 관리실이 나왔다.
“누구…?”
안에서는 나이 지긋한 서고지기 할아버지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마법 약학 과제 때문에 봉사하러 온 강휘입니다.”
“아… 강휘 군이군. 들어오게.”
서고지기 할아버지는 흐릿한 눈으로 강휘를 보더니, 벽에 걸린 낡은 등불을 켜주며 말했다.
“자네는 저기, 제6열람실 안쪽 서가에서 『고대 정령학의 이해』 시리즈를 제5열람실로 옮겨주게. 표지가 낡고 헤진 것들이 많으니 조심하고. 그리고… 가능하면 7열람실 쪽으로는 절대 가지 말게나.”
강휘는 속으로 뜨끔했다. 7열람실. 그곳은 어제 폐쇄 공고가 붙었던 곳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일단 대답하고 할아버지에게 등을 돌려 제6열람실로 향했다. 캄캄한 서고 안에서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책을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고 음산했다. 먼지투성이의 낡은 책들은 보기보다 무거웠고, 등불이 비추지 않는 곳은 마치 어둠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책과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제7열람실 쪽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
“…이런… 기록이 또 사라졌어.”
강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7열람실은 폐쇄된 구역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안에 있었다. 그것도 분명히… 유하의 목소리였다.
강휘는 등불을 최대한 낮추고 발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낡은 서가 뒤편에 숨어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니, 유하가 혼자 촛불을 켜둔 채 낡은 탁자에 앉아 고문서를 펼쳐놓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초췌했고,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며칠 밤낮을 새운 사람 같았다.
“이 페이지… 분명히 어제까지는 마력 흐름에 대한 기록이 있었는데…”
유하는 중얼거리며 손에 든 깃펜으로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은 강휘가 아침에 보았던 바로 그 낡은 양장본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제 보았던 그 마법서 몇 권이 펼쳐져 있었다.
“대체 ‘균열’이라는 게 뭔지… 아무리 찾아봐도 명확한 기록이 없어. 학원 기록실에도, 교수님들한테 물어봐도 다들 묵묵부답이시고… 폐쇄된 이 서고에만 단편적인 정보가 숨겨져 있는데…”
유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강휘는 숨을 죽였다. ‘균열’? ‘폐쇄된 서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젠장, 이 기록들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면을 꿰뚫는 듯했다. 강휘는 등 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유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낡은 서가가 아니라 그 서가 뒤편, 그러니까 강휘가 숨어있는 곳의 벽이었다. 벽에는 낡은 종이로 여러 겹 덧대어 봉인된 듯한 문이 있었다. 그 문 위에는 희미하게 먼지 쌓인 표식과 함께 ‘**접근 금지 – 심연의 균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때였다. 유하의 손에 들려 있던 낡은 양장본에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유하가 놀라 책을 떨어뜨리자, 책은 바닥에 뒹굴며 검은 연기를 더욱 뿜어냈다. 그리고 연기 속에서, 책의 표지에 수놓아져 있던 알 수 없는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문양이 빛나자, 낡은 서가 뒤편의 ‘접근 금지’ 문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진동과 함께, 벽에 덧대어진 낡은 종이들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다.
벽에 새겨진 마법진 같은 형상이 붉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마치 허공이 일그러진 듯한, 검고 깊은 ‘틈’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 틈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도, 어둠도, 그 어떤 형태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절대적인 공허가 존재했다.
강휘는 저절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것이 바로 유하가 말한 ‘균열’이란 말인가? ‘심연의 균열’이라고?
“안 돼… 벌써 이렇게까지…!”
유하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창백해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촛불을 집어 들고 틈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떻게 막아야… 아르카나의 봉인이 이렇게 약해졌을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이…”
유하가 틈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강휘는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유하 씨! 위험해요!”
강휘의 외침에 유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이 강휘를 발견하고 크게 뜨였다.
“강휘 씨?!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여긴 금지 구역이에요!”
유하의 목소리는 짜증과 함께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강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할 겨를이 없었다. ‘심연의 균열’이라 불리는 그 틈이, 강휘의 외침과 유하의 놀란 목소리에 반응하듯, 갑자기 ‘쉬이이익’ 하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의 균열에서,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의 깊은 곳에서,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가 깨어나는 듯한, 섬뜩하고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강휘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냉기에 몸을 떨었다. 저 안에서 대체 무엇이 튀어나올 것인가? 그리고 이 끔찍한 금기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유하와 강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시선 속에는 공포와 함께, 이 거대한 비밀을 마주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결의가 스쳐 지나갔다.
**— 1장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