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화: 그림자 속의 눈
지훈은 식탁 위 텅 빈 맥주 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퇴근 후 두어 개 마셨을 뿐인데 벌써 머릿속이 묵직했다. 최근 며칠, 그의 705호에선 영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피곤해서 그런가 싶었다. 물컵이 저절로 식탁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나고, 분명 잠근 현관문이 아침에 보니 활짝 열려 있었다. 착각이라고 믿으려 애썼다. 뇌가 보내는 피로 신호라고,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젠장, 또야?”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거실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리모컨이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번엔 제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플라스틱 케이스가 벌어졌다. 배터리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지훈은 망연히 그것들을 내려다봤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분명 제자리에 놓여 있었는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착각이라고? 피로? 스트레스? 이건 너무 생생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리모컨과 배터리를 주워들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재빨리 다시 조립했지만, 그의 눈은 이미 거실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어두운 코너, 닫힌 방문,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 모든 곳이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혹시, 누군가 침입한 건가?
그러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현관문 잠금장치는 멀쩡했다. 무엇보다, 이 아파트 7층까지 침입할 정도의 담력을 가진 도둑이 고작 리모컨이나 떨어뜨리고 놀고 있을 리 없었다.
지훈은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친구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지만, 민수는 받지 않았다. 지훈은 다시 한번 걸었다.
“하필 이럴 때 안 받냐, 이 자식.”
초조하게 통화 버튼을 다시 누르려는 순간, 거실 한쪽에 놓인 스탠드 조명이 깜빡거렸다. 마치 전구가 수명을 다한 것처럼, 불빛이 희미해졌다 강렬해졌다를 반복했다. 그것은 전날 밤부터 시작된 현상이었다.
지훈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전기가 불안정한 게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장난스럽게 건드리는 듯한 불규칙한 깜빡임이었다. 그 순간, 지훈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아파트 안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스탠드를 바라봤다. 스탠드 뒤 벽지는 어둡고 무늬 없는 회색이었다. 그리고 그 회색 벽지 위로, 희미하지만 분명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누군가 스탠드 뒤에 숨어 서서, 희미한 빛에 실루엣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림자는 너무나 옅어서, 눈을 깜빡이는 순간 사라졌다. 지훈은 눈을 비볐다.
“뭐… 뭐야?”
환각이었다고 애써 자신을 설득했다. 하지만 심장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이 쿵쾅거렸다. 그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벌떡 일어난 지훈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옷을 대충 걸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
*콰자작!*
거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유리 깨지는 소리.
지훈은 얼어붙었다. 현관문에 손을 뻗으려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등골이 오싹하게 서늘해졌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거실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 화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조각난 파편들이 마치 꽃잎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화병이 깨진 바로 그 자리,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탁자 한가운데에,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문지른 듯한 둥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국 위로, 희미하지만 분명한 검은 재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악!”
지훈은 무의식중에 비명을 질렀다. 화병이 깨진 것도, 이상한 자국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깨진 화병 조각들 위로, 그의 눈동자를 향해 똑바로 서 있는, 희미한 소녀의 형상.
검고 흐릿한 그림자. 하지만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다.
작고 여린 어깨,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 형상 속에서, 마치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두 개의 검은 점.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로 만들어진 존재 같았다.
존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지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공기가 차가워졌다.
지훈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소녀의 형상 또한 한 발짝, 지훈을 향해 다가왔다.
“오… 오지 마!”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소녀의 형상은 멈췄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치 그의 말을 이해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지훈은 소녀의 형상 속에서 섬뜩한 것을 발견했다. 희미한 검은 그림자 속에서, 아주 잠시, 마치 조명탄이 터진 것처럼 섬광이 번쩍였다. 그것은 너무나 짧고 희미했지만, 지훈의 눈에는 또렷하게 박혔다.
소녀의 형상, 그 검은 점들이 있던 자리에서, 핏빛 같은 붉은 빛이 아른거렸다.
그것은 눈이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붉은 눈.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지훈은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틀었다. 현관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고 비틀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를 박차고 나갔다.
복도에 발을 디디는 순간,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젠장… 젠장!”
그는 휴대폰을 꺼내 다시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신호음이 짧게 이어지더니 민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김지훈! 뭔 일인데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민수의 목소리는 짜증이 섞여 있었지만, 지훈에게는 생명의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민수야… 나… 나 지금 죽을 것 같아. 당장… 당장 우리 집으로 와줘. 제발.”
지훈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복도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과 함께 705호 문을 응시했다. 문틈으로, 아주 희미하게, 아파트 안에서 핏빛 같은 붉은 빛이 깜빡이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것은 그의 상상이 아니었다. 분명, 그 눈이 그를 여전히 보고 있었다.
705호 안에서.
아니, 705호 밖의 복도에 웅크린 자신을, 지금 이 순간까지도 똑똑히 응시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