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우울했다. 썩어가는 시체와 먼지, 그리고 희미한 피 냄새가 뒤섞인 공기는 현우의 폐부를 눅눅하게 적셨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 속에는 겨우 이틀치 물과 비스킷 몇 조각이 전부였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서 이미 멸종된 지 오래였고, 남은 것이라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지독한 생존 본능뿐이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웠고, 닳아 해진 전투화는 폐허가 된 도시의 비명을 먹고 자랐다.

오늘은 도시 외곽, 재개발이 한창이던 지역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완성된 고층 건물들의 골조가 앙상한 뼈대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찢어진 현수막들이 처량한 소리를 냈다. 어디를 봐도 똑같은 절망적인 풍경. 그러나 현우의 눈은 작은 변화라도 놓치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수많은 콘크리트 잔해와 폐차들이 널브러진 곳 한가운데, 덩굴에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건물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낡고 바스러진 현대 건축물들과 달리, 이 건물은 마치 수백 년 전의 유적처럼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희미하게 품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지붕을 뚫고 자라나 그 형상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지만, 사이사이로 보이는 돌기둥과 기와 조각들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호기심보다는 생존자의 본능이 그를 이끌었다. 어쩌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보급품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기대감이었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근처에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쿵쾅거리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그 오래된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덩굴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습한 공기 대신 흙과 오래된 나무, 그리고 알 수 없는 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깥 세상의 지옥 같은 소음은 거짓말처럼 차단되어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현우 자신의 발소리마저 죄스러울 만큼 정숙한 공간. 그는 숨을 죽였다.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잘 보존되어 있었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고,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와 기묘한 형상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짐승의 머리를 한 인간 형상, 날개를 가진 거인, 허공을 유영하는 듯한 기하학적인 무늬들. 모든 것이 낯설고 신비로웠다. 현우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그것들을 바라봤다. 대체 어떤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곳을 지었을까. 폐허가 된 세상 속에서 이런 고대의 유적을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장 안쪽, 중앙에는 제단처럼 보이는 묵직한 돌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손바닥만 한 검은색 석판이 놓여 있었는데, 표면에 음각된 무늬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을 비껴간 듯, 먼지조차 앉지 않은 매끄러운 표면이었다. 현우는 이끌리듯 석판에 손을 뻗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등골에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단순한 돌이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미약하게나마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때였다. 으르렁거리는 소리.

현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단단히 닫혀있던 건물 입구의 틈새로, 가느다란 빛과 함께 스며들어온 그림자. 놈들이었다. 셋. 적어도 세 마리의 달그림자가 현우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놈들은 일반 좀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몸집은 놀랍도록 민첩했고, 잿빛 피부 아래로 드러난 근육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손톱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빛났고, 이빨은 짐승의 그것보다도 흉측했다.

“젠장…!”

현우는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세 마리의 달그림자를 동시에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첫 번째 놈이 덮쳐오자, 그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팔을 스쳐 피가 솟구쳤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밀려드는 절망감. 두 번째, 세 번째 놈들이 맹렬하게 현우를 압박했다. 등 뒤는 차가운 돌벽. 사방은 달그림자들의 끔찍한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이대로 끝인가. 죽음의 공포가 그의 목을 조여왔다. 그의 손은 여전히 제단 위의 검은 석판 위에 놓여 있었다.

“젠장! 젠장할 세상!”

아무 의미 없는 절규와 함께, 그의 온몸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석판에서 희미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빛은 순식간에 강렬해지며 제단 전체를 집어삼켰다. 동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공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육중한 진동과 함께 거대한 벽처럼 눈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달그림자들은 그 파동에 휩쓸려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벽에 부딪힌 놈들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히 제압된 듯, 거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빛은 이내 사그라들었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현우는 휘청이며 제단에 기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석판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마치 그 기운이 자신의 일부가 된 것처럼.

그는 멍하니 쓰러진 달그림자들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놈들이, 이제는 마치 마네킹처럼 굳어 있었다. 피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아까부터 느껴지던 옅은 향냄새만이 공간을 채웠다.

이건… 뭐지?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우연일까? 필사적인 순간에 우연히 발동된 어떤 현상일 뿐일까? 아니, 그럴 리가. 이 기이한 경험은 단순한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선명했다. 석판에서 뿜어져 나온 빛, 공간을 뒤흔든 파동, 그리고 달그림자들이 일순간에 무력화된 것까지.

현우의 눈빛은 경계와 함께, 아주 작은, 희미한 희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폐허가 된 세상 속에서, 그는 이제껏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의 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그 문 너머의 미지의 세계를 약속하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석판의 무늬들이, 마치 그를 유혹하듯 아련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