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도시의 늦은 오후는 언제나 그랬듯 회색빛이었다.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은 이 거대한 도시의 숨통을 조이는 듯했고, 높다랗게 솟은 아파트 건물들은 각자의 창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불빛으로 희미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지은은 창가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손에 쥐었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의 끈적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어느덧 바람결에 서늘한 기운이 섞이는 가을이 문턱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원룸 아파트 12층은 평소 같으면 이웃들의 미세한 생활 소음조차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이었지만, 최근 들어 그 고요함이 미묘하게 깨지는 순간들이 잦아지고 있었다.

“어, 이게 또….”

지은은 눈을 비볐다. 분명 방금 전까지 책상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연필꽂이가 침대 옆 협탁 위로 옮겨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단정하게,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지은은 몇 주 전부터 이런 일들을 겪어 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가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분명 내가 치웠는데 깜빡했나 보네.’ 라며 스스로를 설득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매일 아침 습관처럼 마시던 보리차 티백이 커피잔에 담겨 있거나, 잠들기 전 분명히 잠가둔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식이었다.

“뭐야, 또 장난치는 거야?”

그녀는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 대상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존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지은은 이 기이한 현상에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고독한 도시 생활에 지친 자신처럼, 이 존재 역시 홀로 이 공간을 떠다니며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문득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 스탠드 불빛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안녕?”

지은은 무심코 인사했다. 그러자 스탠드 불빛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현상이었다. 처음엔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지만, 이 존재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오히려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잡지를 펼쳤다. 어제 읽다 만 소설이 실려 있는 페이지였다. 하지만 책장은 이미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 있었다. 지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왠지 모르게 허기가 졌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분명 다 먹었다고 생각했던 푸딩이 맨 위 칸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것도 딱 하나,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었다.

“이건… 네가 갖다 놓은 거야?”

지은은 푸딩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어딘가에 있을 ‘그것’에게 말을 거는 자신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대답 없는 공간에 그녀의 목소리만이 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거실 한복판에 놓인 소파 쿠션이 스르륵,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그래.’ 하고 대답하는 것처럼.

지은은 푸딩 뚜껑을 열었다. 부드러운 커스터드 향이 공기 중에 퍼졌다. 스푼으로 한 입 떠먹는데, 문득 어제 잃어버렸던 리모컨이 소파 팔걸이 위에서 발견되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녀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의 삶에 아주 작은 방식으로 개입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밤이 깊어지고, 도시의 불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지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보던 눈이 피로했다. 스르륵, 이불이 살짝 올라왔다. 발가락이 시려워 이불을 끌어올리려던 참이었다. 지은은 미소 지었다.

“고마워.”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닫혀 있던 방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밖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답답했던 공기가 조금씩 순환되는 느낌. 지은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 작고 기이한 존재가 그녀의 일상에 스며든 이후로, 그녀의 고요했던 밤은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확실히 달라지고 있었다. 내일 아침엔 또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 그녀는 작은 기대를 품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