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바람이 몰아치는 무림 대회가 아니었던가.
대체 왜, 지금 내 눈앞의 이 상황은 어쩐지 ‘막장 아침 드라마’처럼 흘러가는 것 같단 말인가.
“흐음, 그러니 이제부터 저희 ‘환상문파’는 ‘무룡문’의 강휘 대협과 ‘청풍문’의 한설아 소협을 파문할 것을 요구합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준결승전 직후였다. 난 방금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몰골로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고, 한설아는 내 어깨를 퍽퍽 치며 “야, 야! 너 방금 마지막에 그거, 꼼수 썼지? 어? 솔직히 불법 아니냐?” 따위의 감상평을 늘어놓던 참이었다. 그 찰나, 갑자기 난데없는 아수라장이 펼쳐진 것이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이름하여 ‘환상문파’의 장문인이라 소개한 늙은 여인이 손가락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옆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한 청년이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관중석은 술렁였다. 고요하던 무대는 한순간에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파문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오?” 사회를 보던 노련한 중년 진행자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그의 말은 곧 수많은 질문들로 뒤섞여 공중으로 흩어졌다.
“대협과 소협이 파문? 듣도 보도 못한 일이오!”
“대체 왜? 경기 도중 부정행위라도 있었단 말인가?”
환상문파 장문인은 기다렸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부정행위? 그보다 더한 죄악을 저질렀소! 이 강휘 대협과 한설아 소협은… 이 몸의 하나뿐인 제자인 ‘환영 (幻影)’을 가지고 놀다 버렸소!”
장문인의 폭탄선언에 무대 위는 물론, 관중석까지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이내 폭풍 같은 비웃음과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하하하! 가지고 놀다 버렸다니, 무림 대회가 아니라 연애 시합이라도 되는 모양이군!”
“환영? 아, 저번 예선에서 강휘 대협한테 10초 만에 발린 그 친구 말인가?”
“무슨 소리야, 한설아 소협한테는 아예 눈길도 못 주고 쳐다만 보던 친구 아니었어?”
강휘인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환영? 가지고 놀다 버렸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아는 환영은 그저… 예선전에서 내 발차기 한 방에 냅다 장외로 날아가 버린, 다소 심약해 보이는 사내였다. 게다가 한설아는 그를 거의 기억조차 못 할 텐데?
옆을 보니 한설아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강휘! 너 바람둥이였냐? 너 내가 지켜보고 있었는데, 언제 저런 불쌍한 영혼을 낚아채서 가지고 놀았어?”
“무슨 소리야! 나도 처음 듣는다고!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환상문파 장문인은 우리의 격렬한 항변에 더욱 격렬하게 반응했다.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이 환영이는 두 사람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무공 수련은커녕 제정신도 아니었소! 환영아, 네가 직접 말해 보아라!”
장문인의 등쌀에 떠밀려 환영이라는 청년이 앞으로 비척거리며 나섰다. 그의 얼굴은 마치 며칠 밤낮을 울기만 한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휘 대협께서는… 저에게 희망 고문을 하셨습니다. 저의… 저의 무공을 칭찬하며… 언젠가는 함께… 무림의 미래를 논하자고… 저를… 저를 꼬드기셨습니다!”
…응? 내 귀를 의심했다. 희망 고문? 무림의 미래를 논하자고 꼬드겼다고?
나는 예선전에서 그와 대결할 때, 그가 사용하는 ‘환영수’라는 무공이 제법 독특하여 “흠, 독특한 무공이로군. 잠재력이 있소.” 딱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게 대체 어떻게 희망 고문이 되고, 미래를 논하자는 꼬드김이 된단 말인가!
옆에서 한설아가 작게 낄낄거렸다. “야, 너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었네? 네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도 사람을 후리는구나.”
“죽을래?”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환영은 이어서 한설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한설아 소협께서는… 저에게… 저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비록… 비록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눈빛만으로도… 저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저의… 저의 전부가 되어 주실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한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시라? 스쳐 지나가는 눈빛? 야, 내가 너랑 언제 눈을 마주쳤다고! 네가 내 뒤통수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걸 몇 번 듣긴 했지만!”
환영은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그것마저… 그것마저 저에게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현이었단 말입니다!”
환상문파 장문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보시오! 이 얼마나 파렴치한가! 두 사람은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소! 이건 무림인의 도리가 아니오! 즉시 파문하여 무림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마땅하오!”
관중석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부는 휘파람을 불었고, 일부는 “강휘 대협! 솔직히 고백하시오!” 따위의 야유를 보냈다.
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아니,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대회에서 이런 스캔들이 터지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인가!
사회자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환상문파 장문인! 다소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무림 대회는 정정당당한 무공 대결의 장이며, 개인적인 감정이나 연애 문제는… 여기서는…”
“연애 문제라고 치부할 수 없소!” 장문인이 말을 잘랐다. “이것은 명백한 ‘무림 풍기문란죄’이며, 그로 인해 제자인 환영이 정신적 고통을 겪고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여 문파의 위신을 떨어뜨렸소! 대회를 계속 진행하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오!”
사회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아… 그리 말씀하시면… 그럼 이렇게 하시죠. 강휘 대협과 한설아 소협, 그리고 환상문파의 환영 군, 세 분이서 이 사태에 대해 직접 해명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게 마이크가 건네졌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저는… 환영이라는 분에게 그 어떤 사적인 감정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무공에 대한 칭찬은 그저… 덕담이었을 뿐입니다.”
다음은 한설아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다.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저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환영이라는 분이 저에게 그런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눈빛으로 연애를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대체 저에게 어떤 눈빛을 보냈다는 건지… 솔직히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
환영은 한설아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장문인이 그를 부축했다.
“보시오! 이 얼마나 상처 주는 말인가! 이렇듯 잔인한 사람들을 어찌 무림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에 둘 수 있단 말인가!”
사회자는 더욱 난감해졌다. “으음… 양측의 주장이 너무나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군요. 이런 경우, 저희 대회 규정에는… 아… 어… 그렇습니다! 저희 규정에는 ‘정식 심판관의 판결에 불복 시,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나는 물론, 한설아, 그리고 환상문파 장문인까지 모두 사회자를 경악한 눈으로 바라봤다.
“무력으로 해결하라니! 설마 지금 싸우라는 말입니까?” 한설아가 소리쳤다.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환영 군이 두 분에게 당한 피해가 막심하다고 주장하시니, 강휘 대협과 한설아 소협이 함께 환영 군과 대결하여, 만약 환영 군을 제압하지 못하면 두 분의 파문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판결입니다!”
장내에는 다시 폭소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무림 풍기문란죄’ 피해자 환영 대 ‘천하 무림의 미래’ 듀오 강휘&한설아의 기상천외한 대결이라니!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설아를 쳐다봤다.
“야,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우리가 왜 저런 애랑 같이 싸워야 돼? 게다가 둘이서? 저 약골 하나를?”
한설아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나도. 근데… 저기 환영 봐봐. 눈에서 독기가 서렸어. 진심으로 우리를 갈갈이 찢어버릴 기세야.”
환영은 장문인의 부축을 뿌리치고 홀로 비척거리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눈빛은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슬픔과 억울함에 절어 있던 눈빛이, 분노와 증오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강휘… 한설아… 너희는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어! 오늘 이 자리에서… 너희의 가증스러운 연애 행각에 종지부를 찍고… 나 환영이… 너희를 무림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것이다!”
환영의 말을 듣자 나는 이 상황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진짜 코미디’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옆을 보니 한설아는 이미 허리춤에서 검을 반쯤 빼들고 있었다.
“젠장, 강휘! 저 자식, 갑자기 왜 이렇게 강해진 것 같냐? 눈빛이 완전 다른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 근데 한 가지만 확실해. 오늘 이 얼토당토않은 ‘풍기문란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천하의 운명이고 나발이고, 우리는 여기서 끝장이야.”
그때 환영의 손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가 ‘환영수’의 궁극기로 보이는 기술을 시전하며 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무대 바닥이 갈라지는 듯한 섬뜩한 기세였다.
나는 급히 한설아를 잡아당겨 피했다.
“조심해! 저 자식, 진짜 진심이야!”
한설아가 이를 갈았다. “하! 진심?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고 진심? 좋아, 그럼 나도 진심으로 상대해주지!”
무림 대회의 하이라이트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희대의 ‘풍기문란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어이없는 싸움에서 살아남아, 천하의 운명을 걸고 다시 무림 고수들과 맞설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환영의 저 집착 어린 분노는 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이란 말인가? 나의 짧았던 덕담이 정말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이었을까? 설마…
왠지 모르게 한없이 불안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