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기 없는 손
유진은 피곤한 눈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새벽까지 밀린 보고서를 붙들고 씨름한 탓이었다. 주방 싱크대 모서리에 놓여있던 커피잔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젯밤 분명 침대 옆 협탁에 두었었는데. 기억이 흐릿했다. 잠결에 마시고 여기에 두었나? 고개를 젓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사 온 지 한 달, 아직 짐 정리가 덜 끝나서 어수선한 탓이리라.
“정신 차리자, 유진아.”
작게 중얼거리며 컵을 헹궈 찬장에 넣었다. 문득 찬장 안쪽 깊숙이 박혀 있던 유리컵 하나가 스르륵, 아주 미세하게 앞으로 밀려 나오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눈을 가늘게 떴지만 컵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역시 피곤한 탓이었다.
그날 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뉴스를 틀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동부 해안 지방의 이상 한파 소식이 흘러나왔다. 리모컨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는데, 픽-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멎었다. 채널이 바뀌었다. 어지러운 노이즈가 가득한 화면에 검은 점들이 점멸했다. 텔레비전을 다시 쳐다봤다. 리모컨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손에 들었던 리모컨을 내려놓고 다시 채널을 돌렸다. 그대로 돌아왔다. 리모컨의 문제는 아니었다. 기기 자체의 문제인가 싶어 전원을 껐다 켰지만, 이내 같은 현상이 반복됐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자기기 오작동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연달아, 그것도 매번 같은 지점에서 멈추는 건… 꽤 기묘했다.
“젠장.”
짜증이 치밀어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 순간,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잡지 한 권이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퍼덕, 하는 소리가 텅 빈 거실에 울렸다. 유진은 숨을 멈췄다. 잡지는 테이블 가운데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바람이 불 리도 없고, 진동이 있을 만한 일도 없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게… 무슨…”
혼잣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르 아파트 12층, 한밤중에 벌어지는 일은 현실감을 잃게 했다. 벽시계를 봤다. 밤 11시 37분.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노려보며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사 오기 전 집에 살던 사람이 혹시… 아니면 이 건물이 뭔가…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잠시 눈을 붙인 사이, 머리맡에 놓아둔 물컵이 스르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헉!”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물컵은 깨지지 않은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분명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었었다. 이젠 더 이상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혜야, 나 좀 이상해.”
다음날 아침,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망설이다 밤새 겪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야, 너 헛것 본 거 아니야?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야?” 지혜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진짜라니까. 컵이 저절로 떨어지고, 텔레비전이 지 혼자 채널을 바꾸고. 처음엔 그냥 피곤한 줄 알았는데, 이제 아닌 것 같아.”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이사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상한 소리야. 너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잖아. 신경성일 거야. 아니면 건물 하자가 좀 심한가?”
지혜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짚으며 애써 위로했다. 그래, 신경성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건물의 문제일 수도. 미르 아파트, 보기엔 멀쩡했지만 새로 지어진 고층 아파트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일을 겪으니, 차라리 오래된 집에서 겪는 일이었으면 덜 무서웠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 혼자 사는 거 무서우면, 잠시 우리 집에 와서 지낼래?”
“아니… 괜찮아. 오버하는 걸 거야. 미안, 쓸데없는 소리 해서.”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유진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젠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
그날 밤, 유진은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는 순간, 무언가 시퍼런 형체가 움직이는 것 같았고,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불안감에 이리저리 뒤척이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갈 무렵, 침대 옆 스탠드 불빛이 깜빡거렸다.
“뭐야… 또?”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두려웠지만, 이젠 오기로라도 맞서고 싶었다. 스탠드를 노려봤다. 깜빡, 깜빡.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장난스럽게 건드리는 것 같았다. 순간, 깜빡이던 불빛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꺼졌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유진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희미하게나마 존재했던 불빛이 사라지자, 어둠이 더욱 짙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젠 심장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공포만이 선명했다.
바로 그때였다.
침대 매트리스가 움푹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침대 위에 앉는 것처럼. 몸을 굳힌 채 숨조차 쉬지 못하는 유진의 옆으로, 차가운 온기가 스며들었다. 이불이 스르륵 끌려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차가운 무언가가 유진의 발목을 휘감았다.
유진은 비명을 삼켰다. 온기 없는 차가운 손이, 발목을 꽉 움켜쥐는 섬뜩한 감촉. 이불 속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유진의 발목을 쥔 그 힘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강렬했다. 마치 차가운 쇠사슬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귀 바로 옆에서 귓가를 간질이는 섬뜩한 속삭임이 들렸다.
_“…반가워.”_
유진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젠 더 이상 상상도, 착각도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했다.
그리고, 유진의 옆에 있었다.
이 방 안에, 바로 지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