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창문 밖은 잿빛으로 물든 수묵화 같았다. 어제부터 이어진 빗방울은 밤새도록 유리창을 두드리며 내 신경을 갉아먹었다. 한지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온몸이 솜처럼 가라앉아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웠다. 어둠이 덜 걷힌 방 안은 어쩐지 예전보다 더 탁하게 느껴졌다. 벽에 걸린 그림들의 색채는 희미해진 듯했고, 아침마다 나를 반기던 햇살의 따스함은 흔적조차 없었다.
“하아…”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언제부터 이랬더라. 이안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던가.
아니, 그건 아니야. 이안을 만나고 내 삶은 훨씬 다채로워졌다. 그의 눈빛은 짙은 밤하늘의 별처럼 깊고 신비로웠고, 그의 목소리는 잊었던 멜로디처럼 내 귓가를 감쌌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다시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나는 알 수 없는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책방에 앉아 손님들을 응대하는 것조차 때로는 버거웠다. 전에는 밤새도록 책을 읽어도 거뜬했던 체력이 바닥난 것처럼 느껴졌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예전보다 창백했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괜찮아, 지우야. 피곤해서 그래.”
나는 거울을 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억지로 끌어올린 미소가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탁자 위에는 이안이 선물해준 하얀 호접란이 놓여 있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꽃을 기가 막히게 알아맞혔고, 그의 손을 거친 식물들은 언제나 생기가 넘쳤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 호접란마저도 이상했다. 며칠 전만 해도 싱싱했던 잎사귀들은 가장자리가 노랗게 변색되어 있었고, 곧게 뻗었던 줄기는 미미하게 처져 있었다. 꽃잎 몇 개는 이미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세상에…”
내가 물을 자주 주지 못해서인가. 아니, 분명 이틀 전에 물을 갈아주었는데. 이상했다.
그때, 현관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었다. 언제나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왔지만, 그의 존재는 늘 따뜻하고 반가웠다. 비에 젖은 어깨에는 검은색 코트가 드리워져 있었고,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은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지우야, 아직 자고 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새벽 숲의 안개처럼 부드러웠다. 그가 다가오는 순간, 눅눅했던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맑아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희미했던 색채가 다시 선명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존재가 주는 절대적인 안정감에 나는 저도 모르게 품에 안겼다.
“이안… 어쩐 일이야?”
“보고 싶어서. 잠시 들렀어.”
그의 품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온기를 가득 머금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내 몸이 너무 지쳐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그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손끝은 섬세했지만, 피부에 닿는 감각은 미미하게 서늘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눈 밑의 그늘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지우, 많이 피곤해 보여. 요즘 잠을 잘 못 자는 거야?”
“글쎄… 그냥 좀 그래. 요즘 들어 계속 피곤해.”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몸이 좋지 않은 거야? 내가 너를 아프게 한 건 아니겠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가 봐.”
나는 그의 품에 기대며 호접란을 흘끗 보았다. 놀랍게도, 아까 전보다 잎사귀가 조금 더 생기를 되찾은 듯했다. 시들었던 꽃잎도 덜 처져 보이는 것이 착각인가 싶었다. 이안의 존재가 주는 활력인 걸까? 그는 내가 지쳐 보인다는 말에, 자신의 기운을 나누어주는 건가? 나는 그의 따뜻한 마음에 또 한 번 감동했다.
“혹시… 내 옆에 있는 게 지우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가끔 생각했어.”
이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슬픔이 묻어 있었다.
“무슨 소리야? 이안이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큼 좋은 건 없어.”
나는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가 나로 인해 약해지는 건… 참을 수 없어.”
그는 나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목덜미에서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히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을 받았다. 마치 온기가 완전히 사라진 듯한, 아주 섬뜩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감각은 사라지고 다시 그의 익숙한 체온이 느껴졌다. 내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랬나 보다, 생각했다.
이안은 내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는 곧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의 존재는 내게 다시금 활력을 주었다. 그가 떠나자마자, 방 안을 채웠던 눅눅함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았다. 환해졌던 색채는 다시 희미해지고, 방 안은 전보다 더 어둡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호접란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방금 전 이안이 있을 때 잠시나마 생기를 되찾았던 호접란이… 거짓말처럼 완전히 시들어 있었다. 노랗게 변색된 잎들은 이제는 힘없이 축 처져 있었고, 줄기는 완전히 꺾여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탐스러운 봉오리를 맺고 있었던 꽃잎들은 전부 바닥에 떨어져 짓이겨져 있었다. 마치 온몸의 기운을 다 빨린 것처럼, 완전히 죽어 있었다.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안이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생기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호접란 화분 밑, 이안이 잠시 서 있던 자리에… 아주 미세한, 그러나 분명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가루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곱게 갈아놓은 듯한, 신비로운 빛깔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끈적임은 없었지만, 내 손끝에 닿자마자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섬광처럼 하나의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며칠 전, 이안과 뜨거운 밤을 보냈던 날 아침. 내 베개맡에도 저런 푸른 가루가 아주 미세하게 흩어져 있었다. 나는 그저 이안의 코트에서 떨어진 보풀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가루는 섬유와는 전혀 다른 질감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길이 닿았던 내 목덜미. 그때 느껴졌던 섬뜩한 서늘함. 이안의 체온은 언제나 이상하리만큼 일정하게 차가웠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아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목덜미를 만져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옅게 얼어붙은 듯한 감각.
그리고 다시 내 손 안에 든 푸른 가루를 보았다.
이안이 다녀간 자리에만 남겨지는 푸른 가루.
이안이 내 곁에 있을 때 잠시나마 생기를 찾았다가, 그가 떠나자마자 완전히 죽어버린 호접란.
그리고 이안을 만나고 나서부터, 나를 갉아먹는 듯한 지독한 피로감.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생기 없는 눈동자.
그리고 목덜미 한가운데, 아주 미세하게, 푸른빛을 띠는 점이 박혀 있었다. 언뜻 보면 점 같기도 했고, 아주 작은 멍 같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빨아들인 흔적처럼 느껴졌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붕괴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만약, 그의 사랑이… 나의 생명을 대가로 한 것이라면?
소름 끼치는 상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의 아름다운 눈빛, 부드러운 목소리, 다정한 손길… 그 모든 것이 나를 사로잡기 위한 유혹이었다면?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걸까.
내 세계에 선명하게 그어진 균열 속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안이 나에게 심은 이 균열의 끝이 어디인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죽어가는 호접란처럼, 모든 것이 서서히 잿빛으로 변해가는 공포만이 나를 집어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