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그놈의 ‘전설’ 때문에 내 통장 잔고는 오늘도 마이너스

“또 라면이야….”

내 손에 들린 건 컵라면 봉지였다. 그것도 늘 먹는,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도는 매운맛. 식어버린 커피 한 잔과 함께 나의 소박한 만찬을 이루는 비루한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런 궁상맞은 식사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인류의 잊힌 역사를 찾아 헤매는 위대한… 아니, 위대해지고 싶은 고고학자, 한지혜니까!

대학교 졸업 후, 난 흔하디 흔한 취업 대신 ‘고대 유적 발굴’이라는, 듣기만 해도 낭만적인 길을 택했다. 물론 낭만은커녕 ‘백수’ 소리나 듣기 일쑤였지만. 특히 주류 학계에서 ‘헛소리’ 취급받는 ‘숨겨진 지하 도시’ 전설을 파고드는 나 같은 별종은 오죽할까.

“정신 차려, 한지혜. 밥은 먹어야 산다!”

축 늘어진 어깨를 펴고, 나는 다시 눈앞의 고서에 집중했다. 여기는 도시 외곽의 낡은 민간 자료 보관소.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이곳은 내게 성지나 다름없었다. 몇 날 며칠을 밤샘하며 해독한 고대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깊은 땅속에, 별의 눈물이 묻힌 곳. 고요히 잠든 도시, 위대한 자만이 그 길을 열리라…」

식상한 문구 같지만, 내 눈에는 달랐다. 이미 수없이 많은 고문헌과 신화 속에서 이 구절을 접했지만, 오늘 발견한 양피지 조각에 그려진 희미한 그림은 달랐다. 구불구불한 선들과 점들이 모여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단순한 장식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정교한, 마치… 지도 조각처럼 보였다.

“이건… 설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낡고 닳아 바스러지기 직전인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펼쳐 들었다. 손끝에서 삭아 들어가는 종이의 감촉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림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문득 책상 한구석에 던져두었던 낡은 놋쇠 나침반이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유물이었다. 그 나침반에도 양피지 속 그림과 비슷한, 아니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할아버지… 설마 이걸 알고 계셨던 거예요?”

나침반에 새겨진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양피지 조각의 지도와 합쳐지자,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손끝에서 전율이 일었다. 그동안 내가 찾아 헤매던 ‘속삭이는 도시’의 지도가… 마침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환희도 잠시, 컵라면은 이미 불어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가 뒤통수를 때렸다. 지도라고 해도,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한 좌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오지 중의 오지를 탐사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장비, 그리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내 학과 교수님들조차 내가 ‘망상에 사로잡힌 아이’ 취급을 했으니 말이다.

“젠장, 이러다가는 잊힌 유적 발굴은커녕 내가 먼저 잊히겠네!”

라면 국물을 들이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문득, 며칠 전 학술지에서 본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미스터리한 모험가, 강준. 또다시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인가? 미공개 유적 발굴, 그 재력의 비밀은?」*

강준. 최근 몇 년 사이, 기존 학계에서는 상상도 못 할 자본과 인력을 동원해 접근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고대 유적들을 발굴해내는 기염을 토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학계의 정식 인물도 아니었고, 그의 발굴 과정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에게는 돈이 많았고, ‘불가능’이란 없었다.

“그래! 저 남자라면… 내 이야기를 믿어줄지도 몰라!”

나는 불현듯 용기가 샘솟았다. 어차피 이대로 주저앉아 라면만 먹다 잊힐 바에야, 뭐라도 해봐야지! 낡은 노트북을 열어 ‘강준’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의 이름 옆에는 늘 ‘K&J 어드벤처’라는 회사 이름이 따라붙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잔뜩 구겨진 정장 차림으로 K&J 어드벤처 본사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고층 빌딩의 유리벽이 마치 내 초라한 모습을 비웃는 것 같았다. 며칠 밤을 새운 티가 역력한 얼굴과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손에 든 낡은 서류 가방.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다.

“저… 강준 대표님 좀 뵙고 싶은데요.”

데스크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당연하게도, 비서실에서는 그의 스케줄이 꽉 차 있다며 나를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양피지 조각에, 그리고 할아버지의 나침반에 모든 걸 걸었으니까.

“제발… 딱 5분만 시간을 내주시면 돼요! 인류의 위대한 발견이 될 겁니다!”

내 목소리가 울림통 큰 로비에 울려 퍼졌다. 보안 요원들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붙잡혀 끌려 나갈 판이었다. 그 순간, 뒤편 엘리베이터 문이 ‘핑’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잡지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키는 훤칠했고, 잘 재단된 고급스러운 슈트는 그의 탄탄한 체격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날카로우면서도 지적인 인상을 주는 얼굴, 차가운 눈빛은 마치 깊은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바로 강준이었다.

그는 로비의 소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전화 통화를 하며 지나쳤다. 내 심장은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기회는 이때뿐이다!

“저기요! 강준 대표님!”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그를 불렀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꽂혔다. 강준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전화 통화를 끊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차가운 눈빛은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를 아는가?”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로비의 공기를 얼렸다.

“네, 네! 대표님! 저는… 한지혜라고 합니다. 고고학자고요! 제가 정말 엄청난 것을 발견했어요! 인류의 역사를 뒤바꿀 만한… 숨겨진 고대 도시의 지도를 찾아냈습니다!”

나는 흥분해서 서류 가방을 열어 낡은 양피지 조각을 꺼내 들었다. 마치 고대 유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꺼냈지만, 누가 봐도 쓰레기나 다름없어 보이는 낡은 종이였다.

“…고대 도시의 지도?”

그의 눈썹 한쪽이 살짝 올라갔다. 냉정하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네! 이걸 보세요! 이 문양… 그리고 제 할아버지의 나침반에 새겨진 이 문양과 합치면…!”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잠깐.”

그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내 손에서 양피지 조각을 휙 채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낡은 양피지 조각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옅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돋보기를 꺼내 양피지 조각을 면밀히 살폈다.

“이게… 전부인가?”

“네? 아, 아니요! 이걸 바탕으로 제가 수집한 다른 고문헌 자료들과 대조해 보면…! 이곳은 단순히 잊힌 유적이 아니라, 전설로만 전해지던 ‘속삭이는 도시’의 입구가 틀림없어요!”

내 열정적인 설명에도 그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냉담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속삭이는 도시라… 흥미롭군. 그럴듯한 망상에 푹 빠진 고고학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지.”

“망상이라뇨! 이건 망상이 아니라…!”

내 반박을 싹둑 자르며, 그는 다시 손을 들었다.

“진짜든 망상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확실한 증거’다. 이걸 가져와서 대체 무엇을 얻고 싶은 거지?”

“저… 저는 발굴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 연구를 완성하고 싶어요! 대표님이라면… 제 이야기를 믿어주실 줄 알았어요….”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고, 나는 이대로 문전박대를 당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강준은 다시 양피지 조각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좋다. 딱 한 번만 속아주지.”

“네?!”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발굴 자금? 좋다. 필요한 만큼 지원해 줄 수 있다. 단, 발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권리는 K&J 어드벤처에 귀속된다. 그리고… 당신은 내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발굴 총책임자는 내가 될 테니까.”

그의 말에 기쁨과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발굴 기회라니! 하지만 ‘모든 권리 귀속’에 ‘절대 복종’이라니! 이건 너무나도… 불공평한 계약 아닌가?

하지만 내 눈앞에는 인류의 위대한 역사가, 평생의 꿈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거대한 기회가 서 있었다.

“어… 저… 그게….”

내가 망설이는 동안, 그는 다시 돋보기를 들어 양피지 조각의 특정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날카로운 직감이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당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할 거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이대로 돌아가 평생 컵라면이나 먹으면서 이 종잇조각을 망상이라 믿을 건지, 아니면 나와 손잡고 진짜 ‘속삭이는 도시’를 발견할 건지.”

그의 차가운 눈빛이 나를 꿰뚫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남자는 정말 위험한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오직 열정과 이 낡은 지도 조각뿐이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 순간, 강준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였다.

“현명한 선택이다.”

그는 다시 양피지 조각을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준비해라. 내일부터 바로 움직일 거다.”

“네?!”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일부터라니! 이렇게 갑자기?

그는 내 당황한 표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이미 로비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비서와 수행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나는 낡은 양피지 조각을 움켜쥔 채, 홀로 덩그러니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었다. 이 거래가 과연 잘한 일일까? 나는 지금 호랑이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설렘이 밀려왔다. 전설로만 여겨지던 ‘속삭이는 도시’를 찾기 위한 나의 모험이, 드디어…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험의 시작에는, 얄미울 정도로 잘생긴 이 남자가 함께할 예정이었다. 지긋지긋한 컵라면 생활은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더 지긋지긋한 모험이 시작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