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궤도: 균열
고요는 때로 가장 거대한 소음보다 더 압도적이었다. ‘제우스’ 호의 함교를 가득 채운 낮은 기계음, 공기 순환 장치의 미미한 웅웅거림, 그리고 저 멀리 항성 엔진에서 전해져 오는 진동마저도 우주가 내뿜는 침묵 앞에서는 미미한 속삭임에 불과했다. 리차드 김 함장은 함장석에 몸을 기댄 채, 창밖으로 펼쳐진 별들의 강을 응시했다. 인류가 그은 모든 지도와 항로를 벗어나, 이름 없는 심연의 가장자리를 탐사한 지 327일 12시간 43분. 이제 그의 눈에 밤하늘의 다이아몬드는 그저 익숙한 배경에 불과했다. 이 끝없는 고독이 때로는 평화롭고, 때로는 영원히 갇힌 듯한 절망을 안겨주었다.
“함장님, 뭔가 포착됐습니다.”
이지훈 조종사의 목소리가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한 옥타브 높게 울렸다. 김 함장은 그제야 고독의 막을 걷어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메인 스크린에는 수많은 별과 성운 데이터 사이, 미미한 에너지 신호가 점멸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곳에 찍힌 작은 잉크 얼룩 같았다.
“위치 확인.” 김 함장이 짧게 명령했다.
“현재 좌표에서 0.3광년 거리. 초기 스캔 결과, 기존에 기록된 어떤 천체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한유진 수석 과학자가 분석 화면에 얼굴을 바싹 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호기심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타고난 탐구자에게 미지는 곧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인공적인 건가요, 박사?” 김 함장이 물었다.
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보다 더… 복잡합니다. 인공물이 가진 규칙성보다는, 마치 살아있는 듯한 불규칙성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위적인 자연 현상이라고 보기엔 너무 정교해요.”
“오류일 가능성은?” 박선우 기술 책임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현실주의자였다.
“선우 씨, 이 장비가 오류를 냈다면 ‘제우스’ 호의 모든 시스템은 이미 엉망진창이 됐을 겁니다. 에너지 패턴은 미약하지만, 지속적입니다. 그리고… 묘하게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완벽하게 이질적입니다.”
“친숙하다고?” 김 함장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네. 마치… 우리 문명의 수학적 원리가 저 안에 녹아든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유진은 설명을 덧붙였지만, 그녀 자신도 확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최윤아 의료 장교는 조용히 승무원들의 생체 데이터를 확인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인지, 미약하지만 모두의 심박수가 평소보다 소폭 상승해 있었다.
“함장님, 접근하겠습니다. 직접 관측해야 합니다.” 유진 박사가 간청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김 함장은 잠시 고민했다. 이 지점에서 회항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호기심을 대변하여 ‘제우스’ 호를 몰고 여기까지 왔다.
“최소 기동으로 접근해. 위험할 경우 즉시 이탈한다. 선우, 모든 방어막을 최대로 올려.”
“예, 함장님.” 선우의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이 스쳤다.
‘제우스’ 호는 천천히, 마치 심해를 탐사하는 잠수정처럼 미지의 신호를 향해 나아갔다. 수천, 수만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동안 신호는 점점 선명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메인 스크린 가득 알 수 없는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함교는 얼어붙은 듯한 침묵에 잠겼다.
“맙소사…” 박선우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탄식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것은 거대했다. 어떠한 별빛도 그것에 반사되지 않았다. 완벽한 어둠. 우주 공간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아니, 구멍이라기보다는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검은 벨벳으로 만든 기념비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압도적인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들이 희미하게,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무늬들은 인류가 알고 있는 어떤 건축 양식이나 자연의 형상과도 달랐다.
“정확히 12번째 궤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지훈이 텅 빈 표정으로 말했다.
“12번째? 무슨 좌표 기준이죠?” 최윤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윤아 씨. 저게 지금… 12번째 궤도처럼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정 항성이나 행성을 중심으로 도는 게 아니라,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곳에 정해진 위치처럼… 스스로의 존재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한유진의 목소리는 경외감과 함께 미묘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유진 박사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구조물의 한 지점, 완벽하게 검은 표면 위에 미세한 균열 같은 것이 보였다. 그것은 물리적인 틈이라기보다는, 공간 자체가 흐릿하게 일렁이는 듯한 비현실적인 현상이었다. 마치 잉크 방울이 물속으로 스며들 듯, 균열의 경계가 희뿌옇게 번져 있었다. 빛은 빨려 들어가고, 시간마저 정지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균열 속에서 미약한 에너지 신호가 주기적으로 방출되고 있었다.
“에너지 방출… 감지됩니다. 극히 미세하지만, 꾸준해요.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유진 박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균열 안쪽으로 심층 스캔을 시도해야 합니다, 함장님!”
“너무 위험해.” 선우가 팔짱을 꼈다. 그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저건 우리가 아는 어떤 물질로도 이루어지지 않았어. 섣불리 건드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학적 호기심을 억누를 순 없어요.” 유진은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그 균열에 홀린 듯 박혀 있었다.
김 함장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거대한 검은 구조물과 그 안의 기묘한 균열을 오갔다. 그의 직감은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인류의 오랜 갈증이 그의 결정을 재촉했다. “최소 출력으로, 최대한 멀리서.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방어막을 최대로 올려.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스캔을 중단하고 이탈한다.”
“예, 함장님!” 이지훈이 신중하게 ‘제우스’ 호의 탐사 파장을 균열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 순간, ‘제우스’ 호 함선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웅- 하는 낮은 진동음이 함선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기계음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울부짖는 듯한, 혹은 거대한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모든 승무원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에너지 반사율 0.0001%! 말도 안 돼!” 유진 박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스크린의 데이터는 혼란스러웠다. 정상적인 데이터가 아니었다. 모든 수치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마치 우주의 모든 정보가 한데 뒤섞여 의미를 잃어버린 듯했다.
“함장님! 승무원들의 정신 활동이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최윤아 의료 장교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모두의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고 있어요! 뇌파도 불규칙적입니다!”
김 함장도 귀가 먹먹해지는 듯한 웅웅거림을 느꼈다.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두통이 지끈거렸다. 그의 눈은 스크린 속, 일렁이는 균열에 고정되었다.
유진 박사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주 희미하고, 아주 오래된, 하지만 명료하게 들려오는 속삭임이었다. 마치 수억 년 전부터 존재했던 존재의 울림 같았다.
_’_너희는… 왔다…’_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감정이었다. 이해였다. 그리고 동시에 절대적인 공포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더 이상 무기물적인 균열이 아니었다.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심연의 우주가, 그 균열 속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수백만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기분. 그녀의 정신은 거대한 존재의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이건… 안 돼.” 유진 박사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이 메인 패널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그녀의 뼈를 타고, 혈관을 타고, 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막을 수 없는 침입이었다.
_’_너희는… 보았다…’_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텅 빈 심연처럼 깊고 어두워졌다. 마치 그 균열의 어둠이 그녀의 영혼 속으로 스며든 듯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김 함장은 유진 박사에게 손을 뻗었다. “유진 박사! 괜찮…”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우스’ 호의 모든 스크린이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섬광을 내뿜으며 꺼져버렸다. 함교는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고, 정적 속에서 유진 박사의 알 수 없는 중얼거림만이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접촉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