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언제나 내게 또 다른 시작이었다. 지루한 수학 문제집을 겨우 덮고 침대 맡의 작은 창문을 열면, 도시의 불빛 너머로 숨겨진 달의 조각이 은은하게 빛났다. 박세린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고등학생인 나는, 이때부터 ‘별빛 마법소녀 에스텔라’로 변신할 준비를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스마트폰의 알람이 울렸다. 보통의 알람음이 아니었다. 주파수 너머에서 울리는 비명과 함께 섬뜩한 기운의 파동이 내 영혼을 흔들었다.
“젠장, 벌써?”
나는 작게 욕설을 읊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험 기간이라 밤새 책상에 붙어 있었더니 온몸이 쑤셨다. 하지만 이런 건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내게는 내가 지켜야 할 도시가 있었으니까.
손목의 은색 팔찌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에스텔라, 변신!”
별빛이 내 몸을 감싸고, 교복은 눈부신 백색의 전투복으로 변했다. 허리춤에는 별 문양이 새겨진 단검이 매달리고, 머리칼은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발밑에서 솟아나는 보석 조각들이 내 몸을 휘감으며 찬란한 날개를 만들어냈다. 손끝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한 짜릿한 기분. 그래, 완벽해. 이 순간만큼은, 나는 평범한 박세린이 아니었다. 나는 도시의 수호자, 에스텔라였다.
알람이 지시하는 곳은 도시 외곽의 폐공장지대였다. 이미 어둠의 권속들이 몰려들어 폐건물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그림자는 밤과 동화되어 흡사 살아있는 악몽 같았다. 녀석들의 어둡고 끈적이는 기운이 내 숨통을 조여오는 듯했다.
“어둠의 노예들아, 감히 이 도시를 더럽히려는가!”
나는 지체 없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손끝에서 별빛 에너지를 응축하여 연약한 어둠의 권속들을 향해 쏘아붙였다. 녀석들은 비명을 지르며 검은 먼지가 되어 소멸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마치 어둠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폐공장 가장 높은 굴뚝 위에 검은 망토를 두른 실루엣이 나타났다. 길고 은빛 도는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휘날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았다.
카인.
그의 등장에 주위의 어둠의 권속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마치 제왕의 행차에 복종하듯, 경외심이 가득한 침묵이 흘렀다.
“또 너인가, 에스텔라.”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밤하늘에 울리는 종소리처럼 섬뜩하면서도, 묘하게 이끌리는 힘이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자, 동시에 지독한 파멸의 예고 같았다.
“이 도시를 노리는 건 너희 종족의 짓이지! 더 이상 내버려두지 않겠어!”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별빛 단검을 뽑아 들었다. 카인은 그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늘 알 수 없는 연민과 함께, 냉철한 경멸이 공존하는 듯했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너희는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은 곧 끝을 맞이할 운명이지.”
“그런 말장난에 속을 줄 알아? 세상을 지키는 건 우리들의 의지야!”
나는 별빛 단검을 휘둘러 그에게 돌진했다. 그는 날렵하게 피하며 검은 안개로 된 채찍을 휘둘렀다. 내 날개를 스쳐 지나간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엄청난 마력이 느껴졌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수없이 싸워왔다. 그와 나는. 마법소녀 에스텔라와 어둠의 왕자 카인.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숙명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공격은 늘 나를 ‘죽이기’보다는 ‘제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를 완전히 소멸시킬 기회가 있었음에도,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 내가 휘두른 별빛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을 때, 그는 고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던가? 그 미소는 늘 내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균열을 만들었다.
폐공장의 거대한 철골 구조물 위에서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내가 마법으로 쏘아 올린 빛의 파편들이 어둠의 권속들을 날려버리는 사이, 카인은 나를 향해 검은 구슬을 던졌다.
“크윽!”
예상치 못한 기습에 나는 미처 방어막을 펼치지 못했다. 검은 구슬이 내 어깨를 강타했다.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날개가 찢어지고, 나는 균형을 잃고 아래로 추락했다. 콘크리트 바닥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에스텔라!”
순간, 내 이름을 부르는 카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환청이었을까? 아니, 분명하게. 절박한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박혔다.
몸이 지면에 부딪히기 직전, 누군가의 강한 팔이 나를 붙잡았다.
그의 품이었다.
카인의 검은 망토 자락이 나를 감싸 안았고, 나는 그의 싸늘한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내게 향했던 차가운 핏빛 눈동자에, 처음으로 혼란과 당황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왜… 왜 나를…”
나는 고통과 혼란 속에서 겨우 말을 토해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꽉 안은 채, 폐공장의 그림자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어둠의 권속들이 아수라장 속에서 나를 찾아 헤매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우리는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뒤에 숨었다. 상처 입은 어깨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품에 안긴 나는 고통보다 더 큰 혼란에 휩싸였다. 그의 차가운 품이 낯설면서도, 어째서인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네 어깨…” 그의 목소리가 지극히 낮게 울렸다. 늘 차갑고 무정하던 그의 목소리에 희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네가… 나를 공격했잖아…” 나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온몸의 신경이 그의 품에 집중되는 것 같았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구슬은 너를 죽일 힘이 없었다. 그저… 너를 잠시 멈추게 할 뿐.”
“거짓말! 네 공격은 언제나…”
“네가 너무 강해서, 나 역시도 언제나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죽이려 한 적은 없었다.”
그의 손이 내 상처 입은 어깨에 닿았다. 차가운 마력이 스며들더니, 놀랍게도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둠의 마력이 치료 마법이라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왜… 왜 이러는 거야? 우리는… 우리는 적이잖아.”
나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붉은색 보석 같은 그의 눈동자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슬픔과 갈등이 서려 있었다. 그의 내면에 거대한 폭풍이 일고 있는 듯했다.
“적… 그래. 우리는 적이지.” 그의 입술이 씁쓸하게 휘어졌다. “하지만, 모든 적이 서로를 미워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그의 말에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나를, 마법소녀인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니, 그 이상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은 더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안 돼.”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우리는 절대로 함께할 수 없어. 너희 종족은 이 세상을 파괴하려 하고, 우리는 지키려 해. 너무나도 다른 존재들이잖아.”
카인은 내 몸부림을 막지 않았다. 그저 나를 놓아주며, 그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슬픔이 응축된 붉은 보석 같았다.
“알고 있다. 우리의 길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차가운 손길은 얼음처럼 시렸지만, 동시에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듯한 묘한 감각을 선사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전류 같은 느낌.
“어쩔 수 없이 끌리는 마음까지…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더군.”
그의 고백에 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금지된 감정의 실체가, 눈앞에 드러났다. 그의 차가운 손길이 내 뺨에 닿아있었지만, 내 심장은 뜨겁게 타올랐다. 이 감정은 죄악이었다.
하늘에서는 다른 어둠의 권속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기운이 점점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들이 우리를 발견할 터였다.
“가야 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무리들이… 나를 찾을 거야. 네가 날 도와줬다는 걸 알면…”
“너 혼자 보낼 순 없다.”
“아니, 괜찮아. 어깨는 많이 좋아졌어. 네가 날 구해줬다는 걸 알면… 그들은 널 의심할 거야. 너의 지위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나는 그를 뒤로하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붙잡는 듯했지만,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다음에 만나면… 우린 다시 적이야. 알지?”
내 말에 카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의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부서진 날개를 겨우 움직여 밤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차가운 손길과 그 붉은 눈동자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종족을 뛰어넘는, 이 금지된 사랑은… 과연 어떤 파멸을 불러올까.
내 가슴속에선 알 수 없는 불안과 함께, 묘한 설렘이 피어났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이 위험한 감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밤하늘의 별들이 차갑게 빛나는 가운데, 나는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날아갔다. 내 가슴속에는 여전히 그가 남긴 온기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사랑의 불씨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